슬픔 한 짐 내려놓고서 - 임현택

 

 

 

  무심천갓길, 쓸쓸히 서있는 플라다나스 빈 가지에 드문드문 달려있 마른 낙엽이 한해의 끄트머리임을 알리 있다. 차창너머로 고개를 돌리지만 영구차에 흐느끼던 여인의 모습이 지워지질 않는다. 낙엽이 떨어져 지듯이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는 모습은 쓸쓸하다.

  국악 사물 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공연차량이 예술의전당 앞 교차로에서 장의 차량과 나란히 신호를 받고 있었다. 공연을 앞둔 단원들은 상여를 만나니 길운이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반면 차창에 힘없이 기대선 유족, 풀어헤친 머리카락사이로 슬픔이 엿 보인다. 한쪽은 곡을 해야 하고 또 한쪽은 풍악을 울려야 하는 묘한 만남, 요람과 황천강의 아이러닉함이다.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이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은 지금과 사뭇 다른 장례였다. 부모상을 당하면 딸이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마당을 돌면서 곡을 하면 왕생극락한다는 어르신들의 한마디에 어머니는 ‘그곳이 불 속인들 못 뛰어들까!’ 무쇠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통곡을 하며 집을 돌았다. 딸의 곡소리는 하늘을 울렸다. 며느리의 곡소리는 대문 밖을 나서지 못한다 하지 않던가! 못다 한 효,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어머니의 눈물은 옷고름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통곡소리는 하늘도 울고 땅도 울렸다. 절로 문상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음은 당연했다.

  삼베두루마기에 누런 건을 쓴 사위인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짚 새끼 허리띠며 머리띠가 무섭다고 벗어버리라고 투정을 부린 나였다. 까실까실한 아버지 턱수염, 누런 상복에 왜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 없었고, 어른들이 딱해하면 혀를 차면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부모님의 그런 모습과는 달리, 상중 내내 멀리 있는 친척들의 방문과 오만가지의 낯선 제사음식을 먹느라 마냥 즐겁기만 했다. 큰 잔치인양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과 많은 조문객들의 방문에 나는 그저 신이 났었다. 오히려 슬픔보다는 또래 친척들 만남이 행복해 놀기에 열중이었다. 철부지인 우리를 어머니가 부둥켜안고 흐느낄 때면 외할머니 죽음보다는 어머니가 운다는 사실에 그저 덩달아 같이 울었다.

  발인 날, 사위 달구질을 하면 왕생극락한다하여 아버지 얼굴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상여(喪輿)에 태워 가직 종구잡이가 요령을 흔들어댄다. ‘저승길 멀다한들 어느 누가 따라가랴, 부모형제 많다한들 누가 대신하랴, 살아평생이 한 못 풀고 원망해서, 불쌍허고, 가련허고, 애절허고도, 처량허지 어허 어와...’ 상여 틀에 칭칭 동여맨 들메끈을 어깨에 짊어진 상여꾼들은 어서 가자고 재촉했고, 꽃상여 매달려 오열의 눈물을 쏟아 내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장지까지 가는 내내 파도치듯 상여를 흔들어 댔고 작은 도랑을 건널 때나 언덕을 오를 때면 사위는 노자 돈으로 저승길을 열어야 했다. 청년시절에 양친을 여의고 장인어른을 친부모 이상으로 모셨으니 그 슬픔이 여북할까. 파도에 쏠리듯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상여 위에서 아버지의 검은 눈물은 누런 상복을 얼룩지게 했다.

  한 평 남짓한 나무관 속에 구천(九泉) 너머 저승길로 가는 화려한 꽃상여에 목 놓아 매달려 우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무심한 상여는 고샅을 빠져 나가 버린다. 어서 가자고.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그리 재촉하던지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는 상여꾼들의 달공 소리는 개울 건너 산 속으로 울려 왕생극락을 빌며 하늘 끝에 울려 퍼졌다. 대문턱을 넘어서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멀어지는 *회다지 소리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또 털 석 주저앉으셨다.

속세의 연을 끊으려 온몸 뒤틀며 불 속처럼 녹아내리는 어머니, 먼발치 상여를 뒤따라가는 연기 속에 몸도 마음도 흔적 없이 버리고 그저 정갈한 수의 한 벌만 입고가시는 외할머니의 저승길. 간간이 바람에 묻어온 달구질 소리에 어머니는 옷고름우로 눈물을 훔친다. 이승과 연을 끊으려 문지방 앞에 깨고 넘어선 바가지, 널브러진 바가지 쪼가리들 속에 주워 올린 수 십 년 흔적을 치마폭에 묻고 섧게도 우 섰었다.

  예술의 전당 교차로에서 만난 장의 차량, 삶과 죽음의 연의 끈을 길게 묶은 검은 리본을 두른 장의 차량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화장장으로 바삐 서두른다. 머리 풀고 하늘로 올라가는 화장터의 영혼이나, 그 옛날 시골 산자락에 허물어진 벽에 온갖 슬픔을 간직한 요령소리나 공허한 넋은 매 한가지다.

한 생명의 탄생은 축복이며 기쁨이라면, 한 생명의 종말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전의 그 복잡하고 긴 장예절차보다 현대의 간편한 장례식이, 슬픔이 더 짙다거나 혹은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 생의 마감에 대한 의식이 가볍게 생각되는 것은 왜 일까?

무성한 이파리를 다 떨어낸 무심천 뚝 플라타나스의 빈가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본다.

  슬픔 한 짐 내려놓고서.

 

 

 

 

 

 

 

* 회다지 - 달구질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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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착과 집착의 차이 / 임 현택

 

이사하는 날. 간밤부터 눈이 내렸다. 이삿날 눈이 오면 부자가 된다는데 밤새 세간위에 소복하게 쌓인 걸 보며 왼지 새 보금자리에 대한 희망적 기대가 부풀었다. 이삿짐을 꾸리기도 전에 식구들에게 천대를 받던 텔레비전, 이사를 오면서 식구들 성화에 신형으로 교체하고픈 마음에 가전제품 매장엘 갔다.

 

발걸음을 잡는 대형벽걸이 평면 텔레비전은, 티 없이 깨끗한 화질과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음향은 한동안 우릴 머물게 했다. 액자처럼 손쉽게 벽에 걸 수 있는 벽걸이 TV 시대가 열려 벽에 걸 수도 있고, 스탠드를 이용해 세워서 설치할 수도 있어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대형화면에 펼쳐지는 화면과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서라운드 음향,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 간 식구들은 온갖 기능에 매료되었다. 매장 도우미는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쏟아내며 홍보하느라 목에 핏대를 세운다. 다기능 화질역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었으므로 구매하고 싶은 욕망이 충동질했지만 만만찮은 호가에 다른 가전제품만 구입하고, 정작 TV는 눈요기로 끝내고 말았다.

 

거실가운데 떡하니 폼 잡고 있는 낡은 텔레비전 앞에 식구들은 차가운 바람이 인다. 아직 멀쩡하지만 리모콘도 없는 구형, 만능 리모콘으로도 작동되지 않는 낡되 낡은 TV. 채널을 한번 바꾸려면 손으로 꾹꾹 눌러야 하는 번거로움에 처음엔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가 지금엔 귀찮은 고물취급을 받는다. 재활용상가에서도 회수를 거부한다는 국보급 이제는 손때가 묻어 강력 세척제로도 닦이지 않다보니 빛바랜 노트와 흡사하다.

 

그 구닥다리 옛TV에서 때맞추어 진품명품이란 프로가 방영 중이었다. 오래된 그릇이다.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한데 몇 백 만원이나 되는 거액이다.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저 흔했던 그릇. 예전에 꿀을 담거나 고춧가루 등을 담았던 것들이 백자니 청자니 이름 붙여져 고가로 매겨진다. 나는 ‘옳거니 이때다’싶어 아이들에게 옛것에 대한 존귀함을 역설했다.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지만 아이들의 냉랭한 표정은 나의 자구적 변명이라는 걸 읽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말이지만 나는 옛것에 대하여 병적으로 애착하고 있다. 사라저가는 것들의 고전적 가치보다도 옛것에서 풍기는 잔잔하고 은은한 고풍이 나를 감흥 시키는 것이다. 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복고보다는 동양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고전 쪽에 마음이 간다.

아파트 도어를 사방무늬 문살에 닥나무 창호지를 바른 옛 문으로 개조해 달아 놓았는가 하면, 거실에는 항아리, 뚝배기, 화로 등 골동품으로 장식을 해놓았으니 나의 괴팍한 고전풍은 애착이라기보다 집착에 가깝다 해야 옳지만 우리나라의 보물들이 거지반 오래된 옛것들이 많은 걸 보면 집착보다는 애착이 맞을 런지도 모른다.

 

자고로 술도 오래된 술이 좋고, 친구도 옛 친구가 좋다 하였다. 낡고 때가 고질고질 묻었지만 투박하나 소박함이 깃들고, 아련하게 전해지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남들 눈에 이것이 궁상맞다던가. 빈티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정신적 안정의 새암 같다.

사람이나 물건들이 애착에서 끝나야 좋을 텐데 쉬이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끓이는 버릇이 몹쓸 나의 집착이다. 물론 고리타분한 헌것들만 고집하는 사람들이야 있겠냐만 적어도 쓸 수 있는 것들을 함부로 버리는 것도 결코 좋은 버릇은 아니다. 글쎄…….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일 테고, 낡고 오래되었지만 정성스레 닦고 고쳐 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유년시절엔 흑백텔레비전 앞에 동네아이들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당시 인기프로인 ‘전설의 고향’을 보던 아릿한 향수, 고무줄놀이에 빠져 있다가도 드라마 할 시간이면 모두들 TV 앞으로 달려갔다.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숨소리조차 죽일 정도로 몰입하며 우린 성장했다. 또한 세상사를 보았고 판도라상자처럼 모든 재앙을 날려 보내며 희망을 얻는 미래에 대한 꿈도 키웠다.

아련한 옛 추억이 담겨져 있는, 또 옛 연인과 같은…….

난 고물 텔레비전을 끝내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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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택 산문집‘여자이고 싶어요’출간
임현택 산문집‘여자이고 싶어요’출간

한국작가 수필부문 신인상을 수상하여 등단한 임현택 수필가의 첫 산문집 ‘여자이고 싶어요’를 도서출판 ‘찬샘’에서 발간했다.

1, 2, 3, 4부로 나누어 68편이 수록된 산문집에는 유년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삶이 정직하게 투영되어 있다.

작가에게 각인되어 있는 기억들은 한 편의 이야기로서 단편적이고 서정적인 것들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연대기적이고 서사적인 구조를 이루고 있다.

가족사가 등장하고 학창시절의 동창을 비롯한 친구들이 등장하며 고향 산천의 풍경과 여행의 기억 등 삶을 아우르는 다채로운 소재들을 내면으로부터 건져 올려 작품으로 써냈다.

이 산문집의 해설을 쓴 최준 시인은 ‘주변과 나, 그 삶의 기억’이라는 제하의 글에서 “수필은 상상력의 영역 안에서 자유롭게 우주 유영을 하는 장르가 아라 경험의 기록이고 사유의 산물이며 허구가 아닌 팩트에 기대어 있다” 며 “쓰는 이와 작품 속의 화자가 동일시되고, 등장인물들의 배경은 예외 없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고 해박한 지식이나 기발한 착상보다는 진실과 깨달음을 한결 소중히 여긴며 거기에는 삶을 모토로 하는 글쓴이의 정서와 사상이 녹아들어 있고, 인간미 물씬 풍기는 전통의 미학이 숨 쉬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수필을 제대로 써내는 일은 삶을 살아내는 것만큼이나 쉽지가 않고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고 만만하지가 않으며,자신의 내공을 고스란히 노출해야 하는 이 일은 사물과 현상과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눈높이와 가슴의 깊이로부터 분출되는 것이기 때문”이라며 “심연의 우물에서 한 바가지 물을 퍼 올려 그 물맛을 보라고 권하는 게 수필이고 혀가 아닌, 가슴으로 읽고 그 맛을 느껴야 하고 자극적으로 혀를 아리게 하지 않으면서도 삶이라는 이름의 사골에서 우러나는 속 깊은 맛이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2011년 / 연영찬기자

 

 

 

 

 

 

이  름 - 임현택

주 소 - 충북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부영아파트 606-906호

E-mail- yu4809@hanmail.net

전 화 - 010 - 4809 - 4569

 

 

* 괴산문협. 한국문인회원

* 전 괴산문협 사무국장

* 한국작가 신인상

* 수자원공사 전국공모전. 괴산 백일장. 충북백일장.

  대덕백일장. 현대건설 전국수기공모전.

  충북도민문학공모전 수상

* 증평괴산저널 에세이 연재

* 충청신문 에세이 연재

* 저서 <여자이고 싶어요>


 

슬픔 한 짐 내려놓고서 - 임현택

 

 

 

  무심천갓길, 쓸쓸히 서있는 플라다나스 빈 가지에 드문드문 달려있 마른 낙엽이 한해의 끄트머리임을 알리 있다. 차창너머로 고개를 돌리지만 영구차에 흐느끼던 여인의 모습이 지워지질 않는다. 낙엽이 떨어져 지듯이 한 사람의 인생이 끝나는 모습은 쓸쓸하다.

  국악 사물 발표회가 있는 날이다. 공연차량이 예술의전당 앞 교차로에서 장의 차량과 나란히 신호를 받고 있었다. 공연을 앞둔 단원들은 상여를 만나니 길운이 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반면 차창에 힘없이 기대선 유족, 풀어헤친 머리카락사이로 슬픔이 엿 보인다. 한쪽은 곡을 해야 하고 또 한쪽은 풍악을 울려야 하는 묘한 만남, 요람과 황천강의 아이러닉함이다.

  어렴풋한 어릴 적 기억이다. 외할머니의 장례식은 지금과 사뭇 다른 장례였다. 부모상을 당하면 딸이 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마당을 돌면서 곡을 하면 왕생극락한다는 어르신들의 한마디에 어머니는 ‘그곳이 불 속인들 못 뛰어들까!’ 무쇠솥뚜껑을 머리에 이고 통곡을 하며 집을 돌았다. 딸의 곡소리는 하늘을 울렸다. 며느리의 곡소리는 대문 밖을 나서지 못한다 하지 않던가! 못다 한 효,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어머니의 눈물은 옷고름을 타고 뼛속까지 파고드는 듯했다. 통곡소리는 하늘도 울고 땅도 울렸다. 절로 문상객들의 어깨를 들썩이게 했음은 당연했다.

  삼베두루마기에 누런 건을 쓴 사위인 아버지의 모습과 어머니의 짚 새끼 허리띠며 머리띠가 무섭다고 벗어버리라고 투정을 부린 나였다. 까실까실한 아버지 턱수염, 누런 상복에 왜 눈물을 흘렸는지 알 수 없었고, 어른들이 딱해하면 혀를 차면 그 소리가 듣기 싫었는지.

  부모님의 그런 모습과는 달리, 상중 내내 멀리 있는 친척들의 방문과 오만가지의 낯선 제사음식을 먹느라 마냥 즐겁기만 했다. 큰 잔치인양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과 많은 조문객들의 방문에 나는 그저 신이 났었다. 오히려 슬픔보다는 또래 친척들 만남이 행복해 놀기에 열중이었다. 철부지인 우리를 어머니가 부둥켜안고 흐느낄 때면 외할머니 죽음보다는 어머니가 운다는 사실에 그저 덩달아 같이 울었다.

  발인 날, 사위 달구질을 하면 왕생극락한다하여 아버지 얼굴에 까맣게 숯을 바르고 상여(喪輿)에 태워 가직 종구잡이가 요령을 흔들어댄다. ‘저승길 멀다한들 어느 누가 따라가랴, 부모형제 많다한들 누가 대신하랴, 살아평생이 한 못 풀고 원망해서, 불쌍허고, 가련허고, 애절허고도, 처량허지 어허 어와...’ 상여 틀에 칭칭 동여맨 들메끈을 어깨에 짊어진 상여꾼들은 어서 가자고 재촉했고, 꽃상여 매달려 오열의 눈물을 쏟아 내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장지까지 가는 내내 파도치듯 상여를 흔들어 댔고 작은 도랑을 건널 때나 언덕을 오를 때면 사위는 노자 돈으로 저승길을 열어야 했다. 청년시절에 양친을 여의고 장인어른을 친부모 이상으로 모셨으니 그 슬픔이 여북할까. 파도에 쏠리듯 이리저리 흔들거리는 상여 위에서 아버지의 검은 눈물은 누런 상복을 얼룩지게 했다.

  한 평 남짓한 나무관 속에 구천(九泉) 너머 저승길로 가는 화려한 꽃상여에 목 놓아 매달려 우시는 어머니를 뒤로하고 무심한 상여는 고샅을 빠져 나가 버린다. 어서 가자고. 무엇이 그리 급하다고 그리 재촉하던지 마지막 순간을 함께 하는 상여꾼들의 달공 소리는 개울 건너 산 속으로 울려 왕생극락을 빌며 하늘 끝에 울려 퍼졌다. 대문턱을 넘어서지도 못하는 어머니는 멀어지는 *회다지 소리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또 털 석 주저앉으셨다.

속세의 연을 끊으려 온몸 뒤틀며 불 속처럼 녹아내리는 어머니, 먼발치 상여를 뒤따라가는 연기 속에 몸도 마음도 흔적 없이 버리고 그저 정갈한 수의 한 벌만 입고가시는 외할머니의 저승길. 간간이 바람에 묻어온 달구질 소리에 어머니는 옷고름우로 눈물을 훔친다. 이승과 연을 끊으려 문지방 앞에 깨고 넘어선 바가지, 널브러진 바가지 쪼가리들 속에 주워 올린 수 십 년 흔적을 치마폭에 묻고 섧게도 우 섰었다.

  예술의 전당 교차로에서 만난 장의 차량, 삶과 죽음의 연의 끈을 길게 묶은 검은 리본을 두른 장의 차량이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화장장으로 바삐 서두른다. 머리 풀고 하늘로 올라가는 화장터의 영혼이나, 그 옛날 시골 산자락에 허물어진 벽에 온갖 슬픔을 간직한 요령소리나 공허한 넋은 매 한가지다.

한 생명의 탄생은 축복이며 기쁨이라면, 한 생명의 종말은 인생에 있어서 가장 슬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예전의 그 복잡하고 긴 장예절차보다 현대의 간편한 장례식이, 슬픔이 더 짙다거나 혹은 덜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 생의 마감에 대한 의식이 가볍게 생각되는 것은 왜 일까?

무성한 이파리를 다 떨어낸 무심천 뚝 플라타나스의 빈가지 사이로 하늘을 바라본다.

  슬픔 한 짐 내려놓고서.

 

 

 

 

 

 

 

* 회다지 - 달구질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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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명상음악과 함께 평안한 하루를.. ☆ 1. 해후(邂逅) - 김영동 2. 霞琳城 3. 마음을 다스리는 경 4. 진정한행복(대금) 5. 바람을 그리며 6. 새 날 7. 무소유(가야금) 8. 인생은 한바탕 꿈 9. 한결같은사랑(김영동) 10. 마음정화 - 김도향 11. 운을좋게하는..- 김도향 12. 바람의 소리(김영동) 13. 숲의노래 14. 요정들의 춤 15. 비개인 삼림-비에 젖은 신록 16. 안개의 향연 - 수풀 저 편에는 17. 새벽 발걸음 18. 자연의 소리 19. 지감 및 뇌호흡(장운동) 20. 어메이징 그레이스 - 나나무스꾸리 21. Danny Boy - 나나무스꾸리 22. 뇌호흡 명상 성우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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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이 시들면 꽃잎은 퇴비가 된다.

그리고 퇴비 위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난다.

우리의 번뇌도 마찬가지다.

- 틱낫한-

 

 

<75>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앞에서 배운 것을 복습하라.

 

‘뭔가 잘 안 된다.’, ‘평소의 능률이 오르지 않는다.’ 공부를 할 때는 반드시 이러한 슬럼프의 시기가 있다.

‘나는 왜 이렇게 못난이인가?’ 등 자신이 싫어지는 이러한 때는 아무리 자기를 채찍질해도 되지 않는다.

이럴 때는 앞에서 공부한 쉬운 데를 복습해 보는 것이다.

 

‘시간의 낭비다’라든가 ‘다른 사람에게 뒤떨어지지 않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슬럼프의 함정에

빠져 있는 증거이다. ‘급할 때는 돌아가라’라는 말이 있듯이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을 하지 말고

오히려 한 발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다시 시작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다.

 

 

슬럼프는 다음 단계로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다. : 바둑이나 자이와 같은 실내 게임도 그렇고

축구나 럭비와 같은 스포츠도 시작하면 잠시 기술도 오르고 흥미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수준에 오르게 되면 진도도 정지하게 되고 일종의 슬럼프 상태에 빠지게 되는데

공부를 하는 경우에도 아무리 노력하여도 성적이 오르지 않고 마음만 조급해지는 때가 있다.

 

이러한 상태를 심리학에서는 ‘연습의 고원(高原)’이라고 말하며 이것은 어떤 종류의

기술을 습득할 때에 반드시 피할 수 없는 장벽이 아닌가 생각한다.

즉 어느 정도 기술 습득이 되면 그 방법에 익숙해지고 그 방법이 안정적이며 자동적이 되는 것이다.

이 단계를 지나서 고도의 기술에 눈을 돌렸을 때 다음의 진도가 시작되고

더 높은 기술을 몸에 붙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미국의 브라이언과 하터라고 하는 학자가 말한 학설로써 ‘숙달의 계급제설’이라 불리워지고 있다.

말하자면 앞에서 말한 연습의 고원이라고 하는 것은 하급 상태에서 상급 상태로

옮겨가는 일종의 도약 단계가 되는 것이다.

 

이럴 때 흔히 공부에 대한 의욕을 잃게 되고 싫증이 나기 쉬운데 주저하지 말고

‘지금까지 하던 노력을 계속해야지’라고 자기 자신을 타일러야 한다.

어떠한 산이든 언덕이든 언제까지나 계속 되는 것은 아니며 착실한 걸음으로

계속 걷고 있으면 얼마 안 가서 편한 내리막길이 반드시 나타나는 것이다.

슬럼프라는 것은 다음의 더 높은 곳으로의 도약을 하기 위한 발판인 것이다.

 

- 두뇌효과를 101% 발휘하는 테크닉의 101 법칙 집중력

多湖輝 저/김교영 역, 민성사 발행

애착과 집착의 차이 / 임 현택

 

이사하는 날. 간밤부터 눈이 내렸다. 이삿날 눈이 오면 부자가 된다는데 밤새 세간위에 소복하게 쌓인 걸 보며 왼지 새 보금자리에 대한 희망적 기대가 부풀었다. 이삿짐을 꾸리기도 전에 식구들에게 천대를 받던 텔레비전, 이사를 오면서 식구들 성화에 신형으로 교체하고픈 마음에 가전제품 매장엘 갔다.

 

발걸음을 잡는 대형벽걸이 평면 텔레비전은, 티 없이 깨끗한 화질과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음향은 한동안 우릴 머물게 했다. 액자처럼 손쉽게 벽에 걸 수 있는 벽걸이 TV 시대가 열려 벽에 걸 수도 있고, 스탠드를 이용해 세워서 설치할 수도 있어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대형화면에 펼쳐지는 화면과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서라운드 음향,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 간 식구들은 온갖 기능에 매료되었다. 매장 도우미는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쏟아내며 홍보하느라 목에 핏대를 세운다. 다기능 화질역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었으므로 구매하고 싶은 욕망이 충동질했지만 만만찮은 호가에 다른 가전제품만 구입하고, 정작 TV는 눈요기로 끝내고 말았다.

 

거실가운데 떡하니 폼 잡고 있는 낡은 텔레비전 앞에 식구들은 차가운 바람이 인다. 아직 멀쩡하지만 리모콘도 없는 구형, 만능 리모콘으로도 작동되지 않는 낡되 낡은 TV. 채널을 한번 바꾸려면 손으로 꾹꾹 눌러야 하는 번거로움에 처음엔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가 지금엔 귀찮은 고물취급을 받는다. 재활용상가에서도 회수를 거부한다는 국보급 이제는 손때가 묻어 강력 세척제로도 닦이지 않다보니 빛바랜 노트와 흡사하다.

 

그 구닥다리 옛TV에서 때맞추어 진품명품이란 프로가 방영 중이었다. 오래된 그릇이다.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한데 몇 백 만원이나 되는 거액이다.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저 흔했던 그릇. 예전에 꿀을 담거나 고춧가루 등을 담았던 것들이 백자니 청자니 이름 붙여져 고가로 매겨진다. 나는 ‘옳거니 이때다’싶어 아이들에게 옛것에 대한 존귀함을 역설했다.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지만 아이들의 냉랭한 표정은 나의 자구적 변명이라는 걸 읽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말이지만 나는 옛것에 대하여 병적으로 애착하고 있다. 사라저가는 것들의 고전적 가치보다도 옛것에서 풍기는 잔잔하고 은은한 고풍이 나를 감흥 시키는 것이다. 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복고보다는 동양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고전 쪽에 마음이 간다.

아파트 도어를 사방무늬 문살에 닥나무 창호지를 바른 옛 문으로 개조해 달아 놓았는가 하면, 거실에는 항아리, 뚝배기, 화로 등 골동품으로 장식을 해놓았으니 나의 괴팍한 고전풍은 애착이라기보다 집착에 가깝다 해야 옳지만 우리나라의 보물들이 거지반 오래된 옛것들이 많은 걸 보면 집착보다는 애착이 맞을 런지도 모른다.

 

자고로 술도 오래된 술이 좋고, 친구도 옛 친구가 좋다 하였다. 낡고 때가 고질고질 묻었지만 투박하나 소박함이 깃들고, 아련하게 전해지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남들 눈에 이것이 궁상맞다던가. 빈티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정신적 안정의 새암 같다.

사람이나 물건들이 애착에서 끝나야 좋을 텐데 쉬이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끓이는 버릇이 몹쓸 나의 집착이다. 물론 고리타분한 헌것들만 고집하는 사람들이야 있겠냐만 적어도 쓸 수 있는 것들을 함부로 버리는 것도 결코 좋은 버릇은 아니다. 글쎄…….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일 테고, 낡고 오래되었지만 정성스레 닦고 고쳐 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유년시절엔 흑백텔레비전 앞에 동네아이들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당시 인기프로인 ‘전설의 고향’을 보던 아릿한 향수, 고무줄놀이에 빠져 있다가도 드라마 할 시간이면 모두들 TV 앞으로 달려갔다.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숨소리조차 죽일 정도로 몰입하며 우린 성장했다. 또한 세상사를 보았고 판도라상자처럼 모든 재앙을 날려 보내며 희망을 얻는 미래에 대한 꿈도 키웠다.

아련한 옛 추억이 담겨져 있는, 또 옛 연인과 같은…….

난 고물 텔레비전을 끝내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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