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탑사는 대동여지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충북 진천군 진천읍 보련산 자락의

연꽃골(蓮谷里)에 우뚝 서 있습니다.

 

연꽃골은 진천읍에서 서쪽으로 약 12km 되는 곳에 있으며, 가는 길에 김유신장군 생가터가 있으며

보탑사 못미처에는 큰 저수지가 있어 풍광이 빼어난 곳입니다.

특히 이 연꽃골이 유명한 것은 우리나라에 단 3기 뿐 인 백비(비문을 새기지 않은 비,

보물 제404호)가 있기 때문입니다.

 

 

   * 충북 진천 보탑사 *

   비구니 스님들이 가꾼 야생화와 봄꽃으로 보탑사의 5월은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한련화, 금낭화, 할미꽃, 물망초, 하늘매발톱 그리고 소나무들은

   목탑과 어우러져 연화의 미소처럼 평온하게 안긴다.

 

 

 

 

    -- 굻은 쇠사슬을 끌고 가는 형상을 한 목탑 지붕 --

 

 

 

 

    간신히 매달린 이슬방울이 숨소리에 떨어낼까,

    연등 사이로 올라온 햇살이 이슬을 훔쳐갈까,

    마음이 바쁘다... (좀 어둡게 나왔네요)

 

 

 

 

 

 

 

 

 

 

[2013 영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이상렬

 

이명耳鳴

 [2013 영주신춘문예 수필 당선작] 이상렬

 

남겨진 풍경마다 어둠이 내렸다. 또 밤이다. 부산하게 오가던 골목에 인기척이 사라졌다. 모든 것이 흐릿한 형체로 남겨질 무렵에서야 서재로 돌아왔다. 나의 지문을 화석처럼 안고 있는 빼곡한 책장의 책들, 수많은 생각과 번뇌를 기억의 저편으로 잠재우게 했던 책상, 가장 가까이에서 체온을 나누며 몸을 의지한 의자, 모든 풍경이 오랫동안 묵혀 두어 익숙함에도 오늘따라 낯설어 보인다.
의자에 앉아 두 손을 책상 위에 모은다. 하루가 주마등처럼 스쳐가고, 오늘과 내일이 교차된다. 생각의 덩어리가 커지고 한없이 깊어지는 시간이다. 때론 마음의 향방이 거미줄처럼 여러 갈래로 나누어져 혼돈스러워질 때면 조용히 눈을 감는다.


현실과 멀어져 가는 이상들은 꿈결인지 생각인지도 모를 무아無我의 세상으로 나를 몰고 간다. 빛과 파장, 소리와 형태, 느낌과 흐름이 함께 공존하는 곳.


윙-, 윙-, 윙-, 삐---, 한 줄 소리가 바늘처럼 뇌리를 뚫고 지나간다. 누군가가 라디오 주파수를 돌려대며 이 밤을 지새울 작정인가 보다. 쉽게 사라지지 않는 소리를 피해 더 깊은 곳으로 몸을 옮긴다.


숲이다. 생명이 움트기 위해 잠시 웅크리고 있는 시간은 사방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어둡다. 고요하다.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는 숲의 적막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길 위로 천천히 발을 옮겨 놓는다. 풀들이 몸에 부딪힌다. 조용하면 더 뚜렷해지는 것이 소리일까. 스윽-, 신경을 곤두세운 소리들이 나를 올려다본다. 지금 나는 불청객처럼 흘러들어 숲의 고요를 깨뜨리고 있다. 찌르르-, 찌르레기가 울고, 매앰 맴-, 끼르끼르-, 매미, 귀뚜라미가 사방에서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둘러보아도 그들의 형체는 보이지 않는다.


땅이 울렁이고 사방이 흔들린다. 온 숲을 밀어붙이는 굴착기 소리, 찌익찌익- 쇠를 갈아내는 잔인한 소리들이 나를 공격한다. 주저앉아 귀를 틀어막아도 소용이 없다. 그들은 나를 용서하질 않는다. 모두가 나를 향해 원망하고 있는 듯하다.


시간을 따라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걸까. 숨통을 죄어오던 숲이 멀리 있음을 직감으로 알았다. 여전히 사방은 실루엣으로만 형체를 내보이고 있다. 어디선가 비릿한 바다 냄새가 난다. 뻗으면 손에 닿을 것 같은 거리에 물결이 서 있는 듯하다. 차르르-, 수면은 잔잔했다. 바다의 놀음에 심취되어 몇 발자국 옮겨 놓는다. 차르르르-, 자갈을 밟는 발자국 소리에 파도가 나의 침입을 눈치 챈 듯했다. 쏴아-, 나를 집어삼킬 듯 고개를 쳐들고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높이 일어선 파도는 위협이라도 하듯 달려와 바위에 장쾌히 부서지며 제 형체를 드러낸다.


자리에 누웠지만 소리의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루 중 마지막 고비다. 깊은 밤이면 더 선명하게 들려오는 소리에 지쳐 몸은 바닥으로 스르르 녹아든다. 소리의 무릎을 베고 잠이 든다.


첫 소리의 여행이 시작된 것은 스무 해 전이었다. 어느 날 귓가에 생면부지의 수상한 객이 찾아왔다. 처음엔 그저 조금 거슬릴 뿐 고통은 아니었다. 시간이 가면 잠잠해지리라 믿었지만 서서히 마수를 뻗어 온갖 소리로 제 본색을 드러냈다. 잠시 잠잠하다 싶다가도 몸뚱이가 지치면 스멀스멀 기어 나와 정신을 교란시킨다. 그럴 때마다 현기증이 일어 바닥에 주저앉곤 했다. 불면의 날이 지속되면 될수록 내 영혼은 소리로부터 유린당하고 있었다.


얼마를 더 견디면 오늘이 지난단 말인가. 오늘만 참으면 내일이 올까. 동 트기가 얼마나 힘에 겨운가를 이명을 지독하게 앓아본 사람은 알리라. 새벽을 깨우며 일어날 때, 이제 제발 멈추길 바라는 그 희미한 기대가 깨어지는 순간, 오죽했으면 연명延命의 꿈마저 풀어버리고 싶은 생각도 해보았으랴.


세상의 소리들은 물속에서 들려오는 바깥의 소리처럼 웅웅 거렸다. 바닥까지 가라앉은 마음은 혼탁해져서 표정마저 일그러뜨렸다. 진저리를 치며 돌아서도 메아리치는 건 매한가지였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소리들은 삶의 흐름을 건드리며 나를 조롱하기까지 했다. 세상의 소리가 자유자재로 나부대는 낮에는 그나마 잊을 수 있다지만, 밤은 쇠사슬에 묶인 듯 고통의 세계로 끌려가고 있었다. 칭칭 감고 있는 지긋지긋한 소리의 사슬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산 능선 위에 낮달이 희멀겋게 걸려 있던 어느 가을, 밤새 소리에 난타 당한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갔다. 초점 없는 눈, 맛을 잃은 입, 세상 어디에서도 대접 받지 못할 야윈 몸으로 버스에 올랐다. 창문으로 내려다보이는 아양교의 물결은 단정했다. 잠시 고요에 빠져있을 때 다시금 집채만 한 파도가 밀려오는 듯 요란했다. 창문에 머리를 기댔다. 목으로 넘어가는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힘없이 무너지는 한 남자가 차창 속에 있었다. 결핵을 앓아 핏기 없고, 퀭한 두 눈과 광대뼈만이 덩그러니 자리 잡아 얼굴임을 말해주던 남자, 깡마른 체구에 폐 구석구석까지 균들에게 내어준 그 남자는 어쩌면 물결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시간은 고통도 잠재우는 묘약이었을까. 소리와 동거하는 스무 해 동안 고목이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 나는 아직도 건재하다. 그러고 보니 군데군데 옹이 여럿 품고서 중년의 고개를 넘어가고 있음이 참 다행스럽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이다. 마치 실체 없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그림자와 같은 것, 그것은 허상이었다. 지난 세월 동안 숱하게 나를 위협했다지만, 따지고 보면 단 한 번도 나를 문밖으로 내몰지 못했다. 내 안에서 만든 소리는 그럴 힘이 없다. 안에서는 소리의 폭군이라지만 바깥에서는 맥을 못 춘다. 그래서 소리는 무형의 포효다. 나를 찢고 파괴할 발톱도 가지지 않았었다. 어쩌면 그간 내 스스로 자신을 얽어매며, 가두며 더 크게 고통의 소굴로 내몬 것인지도 모른다.


고통도 오랜 세월 같이 살다 보면 벗이 되는 것인가. 이제 나는 이명에 대한 익숙하고도, 자연스러운 생존법을 터득했다. 처음엔 금은방의 저울처럼 미세한 소리의 무게에도 휘청거렸으나, 이제는 넉살좋고 인심 후덕한 재래시장의 방앗간 저울처럼 큰 보릿자루 서너 개쯤 올려놓아도 거뜬히 소화해내는 여유가 생겼다. 이명은 나를 산 채로 굴복시키기 위한 덫이 아니라, 어쩌면 긴 생의 여정을 함께 걸으며 나를 더 단단하게 만든 동반자였는지도 모른다.


요즘 이명을 대하는 내 뱃심이 제법 두둑해졌다. 소리를 삼 시 세 끼로 먹고, 내 걸음의 디딤돌로 여기며 인생의 강물을 저벅저벅 걸어 여기까지 살아서 다다랐다. 우리네 삶이 언제 고통이 없었던 적이 있었던가. 노력하여 바꾸지 못한다면 받아들이는 지혜를 터득하는 것이 옳으리라. 뼈에 사무치는 아픔보다 더 위대한 것은 그것에 대한 건강한 해석이 아닐까.


그랬다. 이명은 세상과 나를 단절시키는 장벽이 아니었다. 이명耳鳴은 이명異鳴을 듣게 한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 내 귀의 소음이 커질수록 상대의 세밀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이치리라. 온갖 고민을 끌어안고 사는 사람들의 소리가 이윽고 들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얼마나 아픔이 서려있는지, 무거운 인생의 짐이 얹혀 욱신거리는지 이명耳鳴을 앓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사르륵 사륵, 소리가 먼저 일어나 여명을 밝힌다. 오늘도 긴 소리의 여행길에 오른다. 이젠 제법 여행을 즐길 배낭 하나쯤 거뜬히 꾸려 나선다. 숲을 걸으며 만나게 될 바람, 물, 새, 매미, 귀뚜라미들, 바다가 들려주는 파도의 속삭임, 이제 그들의 이야기를 가만히 귀 기울이고 들어볼 참이다. 때로는 나의 이야기도 그들에게 들려 줘 볼까 한다. 모든 것이 허상이어도 좋다. 남들과 공유할 수 없는 소리들이 내 안에 기거하는 동안 나는 더 넓어지고, 더 여물어지는 여행을 떠날 것이다. 아프지만 깊은, 쓸쓸하지만 아직도 가야 할 여행을.

 

 

 

* 도편수의 슬픈 사랑이야기 *

 

강화도는 갈 때마다 매번 신비함을 안겨주는 섬이다. 많은 유물 유적지가 있지만 그 중 전등사의 대웅전이 발목을 잡아끈다.

전등사는 조선선조 광혜군 6년 큰 불이 일어나 절이 모두 타버려 그 이듬해 다시 짓기 시작하여 7년만에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고 한다.

석가여래삼존불을 모시고 있는 대웅전은 앞면 3칸, 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한 장식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이다.

특히 대웅전 처마 밑에 나부상이 가장 이상적이다.

 

나부상은 공사를 맡았던 목수의 재물을 가로챈 주모의 모습이라는 전설이 전해져 오는데, 재물을 잃은 목수가 주모의 나쁜 짓을 경고하고 죄를 씻게 하기위해 발가벗은 모습을 조각하여 네 귀퉁이 추녀를 떠받치고 있는 여인의 나체형상인 나부상이다.

당시 마니산에 전등사 건립 공사가 한창이었다. 십여명의 전문공들이 엄격한 규율에 따라 정성껏 사찰을 짓고 있었다.

사찰을 건립하는 공사이기에 시작하는 아침에는 양 손을 정화수에 깨끗이 씻고, 승려들과 함께 간단한 예불을 드렸다 그리고 공양을 들 때도 승려와 마찬가지로 육류와 술 등을 일 체 금하는 절 음식을 먹었다.

 

그러나 힘이 생명인 목수들에게 제한 금식이란 참으로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힘든일을 하는 분들은 으레 음주가무를 즐기는 법.

이 공사의 책임을 맡은 도편수라는 사람도 더욱 견디기 힘들었다. 도편수는 눈에 띄게 손놀림이 노련한 재주꾼이지만 손재주 못지않게 주색에 능한 사람이었다.

그런 술꾼에게 사찰의 규율이 따위는 대수가 아니었다. 공사에 착수한 지 일주일째 되던날, 도편수는 몰래 산 아래에 있는 주막으로 내려갔다.

 

주막에 지금으로 말하면 얼굴마담이 있었다. 그의 미모가 천하절색이지라 도편수는 그동안 주색에 굶주려 있던 터라 단숨에 술병을 비웠다. 살갑게 달라붙는 여인을 잊지 못해 틈 날 때마다 도편수는 주막을 찾았다.

도편수는 진정한 한량인지라 내외적으로 완벽하게 일에 열중했고 재주 많고 성실한 목수였기에 주위사람들 기대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완벽한 도편수는 끊임없이 주막 요부와 내통했고 심지어 그간 번 돈도 맡길 정도로 정도 깊어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도편수는 주막을 찾았는데 그 여인이 보이지 않았다. 주모 말에 의하면 간밤에 또 다른 사내와 눈이 맞아 *도편수의 돈을 가지고 야반도주를 했다는 것이다.

도편수는 지난 수개월동안 쌓아온 정과 쏟아온 정성이 분노로 치밀어 올랐다.

복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목수는 그길로 곧장 공사장으로 달려가 그녀와 흡사한 모습의 나체 여인을 깎아 추녀 밑에 달았다. 죽어서도 옷 한 벌 걸치지 말고 무거운 추녀를 떠받치며 회개하라고 말이다.

 

당시 복수에 불타 만든 나체 형 나부상조각 현재 예술로 승화되고 전등사 대웅전을 더욱 아름답게 꾸며주며 조선중기 이후 건축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 받고 있다.

비록 주색에 눈이 어두워 모든 것을 잃은 도편수의 아픔이 예술조각으로 후세에 빛을 받고 있으니 우린 그의 아픔을 위로하심이 어떨까.

 

 

* 도편수 - 목수의 우두머리

* 강화도 전등사 *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선사 시대의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왕검의 얼이 담긴 마니산, 고려 때의 대몽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에 이르기까지 강화도의 역사는 곧 한민족의 역사나 마찬가지였다.

 

전등사는 조선의 숭유억불 정책에도 불구하고 향화(香華)가 그치지 않았던 가람이다.하지만 여느 고찰과 마찬가지로 전등사도 몇 차례의 화마를 겪었다. 조선 광해군 때인 1614년에도 화재로 인해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지경 스님을 중심으로 한 대중이 재건을 시작해 1621년 2월에는 전등사의 옛 모습을 되찾았다. 지금까지 건물의 건축적인 가치는 물론 ‘나부상’으로 더욱 유명한 전등사 대웅전(보물 178호)도 이때 중건되었다.

 

 

   전등사 일대를 에워싸고 있는 삼랑성은 국가사적 제13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성은 고대 토성의 흔적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단군의 세 아들인 부여·부우·부소가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대웅보전 *

  규모가 작은 대웅보전은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가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으로 손꼽히며 현재에도 아름다움의 조각상은 으뜸.

  특히 대웅전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하고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습니다.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의

  연, 모란, 당초가 정말로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 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체워져

  있습니다. 꼼꼼히 살펴 보시면 절로 감탄사가 나올 겁니다.

  초파일인지라 내부 사진을 촬영하지 못했습니다

  네 귀퉁이의 처마에 조각상 "나부상(아래 사진)"을 감상 해 보세요.

 

 

   대웅보전의 외관상 특징은 우선 비슷한 시기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간의 변화를 보여 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곡선이 심한 지붕과 화려한 장식(나부상, 동물 조각, 연꽃 조각 등)이

   그런 특징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의 나부상의 모습입니다.

    도편수의 슬픈 사랑을 생각하면서 천천히 감상 해 보세요.

   도편수의 슬픈 사랑이야기는 다음 편에 있습니다.

 

 

 

 

 

 

 

 

    "불교와 미술의 만남, 즉 종교와 예술의 공존·조화를 기도하는 공간"이라고 합니다.

 

    * 초파일임에도 댓돌위에 나란히 있는 털신이 참으로 정겹게 다가 옵니다.*

 

 

    * 죽림다원 *

     전등사를 둘러 보시고 이곳 다원에서 차 한잔의 여유를 가져 보세요.

 

 

* 강화 석모도의 보문사 *

 

 

창건 당시 관세음보살이 상주한다는 산의 이름을 따서 낙가산이라고 하고, 관세음보살의 원력이 광대무변함을 상징하여 보문사라 이름 짓고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이처럼 산과 절의 이름이 모두 관세음보살을 상징하고 있어 보문사가 관음도량임은 창건의 역사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인천 강화도 서쪽의 석모도에 자리하고는 보문사는 양양 낙산사, 금산 보리암과 함께 우리나라 3대 해상 관음기도 도량입니다.

보문사는 참으로 아름다운 사찰입니다.

오랜만에 발길이 머무는 곳에 다녀왔습니다.

 

보문사엘 가시려면 강화도 외포리 선착장에서 석모도까지 배로 가야 합니다.

외포리 선착장에서 승용차와 함께 승선해서 석모도 도착.

석모도는 조용하고 휴양하기 좋은 곳이라 생각이 듭니다.

이날 안개가 낀 날씨인지라 사진이 흐릿합니다.

 

 

 

 

 

 

 

 

 

 

33관음 사리탑의 뒷편을 둘러 감싸안듯 오백나한이 모셔져 있습니다.

나한이라 함은 아라한과를 증득한 존자를 말하며 열반경에 이르시기를 “아라한과(阿羅漢果)는 저 피안에 이르렀다고 이름하느니라. 아라한과는 무학(無學)의 법신(法身)이니,

계율과 선정과 지혜와 해탈과 해탈의 지견(知見)이니라.

오백분의 모습과 표정이 모두 달라 각각의 개성적인 모습을 자유분방하게 나타내고 있습니다.

 

 

 

 

    * 소원을 담아 기도를 올리면 이뤄진다고 합니다.*

 

 

 

 

 

 

 

 

 

‘눈썹바위’라고 부르는 커다란 바위 밑에 마애관음좌상이 있습니다.

보문사의 상징인 것 같습니다.

이른 아침이라 안개가 많이 낀 날씨인데도 불구 많은 신도들이 기도드리는 모습에

저도 소원을 빌어 보았습니다.

 

 

 

 

 

느티나무는 향나무 옆 천인대 올라가는 계단 입구에 두 그루가 나란히 자라고 있습니다.

둘 다 수령은 약 290년이고 크기도 비슷해서 높이 16m, 둘레 4.8m 정도이며

현재 군(郡)지정 보호수로 관리되고 있습니다.

 

 

진안 마이산(馬耳山)

 

암마이봉(686.0m)과 숫마이봉(679.9m)으로 구성되어 있는 마이산은 두 산봉우리가 서

있는 모양이 말의 귀 모양을 하고 있다하여 마이산으로 명명된 것으로 전해져 온다.

마치 커다란 바위 두 개가 땅위로 우뚝 솟아 올라온 것 같은 형상이다.

마이산 등반은 현재 통제되고 있는 상황이라 먼발치에서 정산을 구경만 하고

돌탑으로 유명한 마이산 탑사에 들렀다.

천지탑은 성심을 다해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한다.

천지탑앞에서 동전을 올려놓고 기도하는 모습을 요즘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기도하는 모습이나 주위에 장관을 이룬 돌탑이나 참으로 아름다운 마이산이다.

 

 

 

 

 

 

 

 

 

 

 

 

 

여행의 묘미는 아마도 사진이 아닌가 싶습니다.

무엇보다도 겨울여행의 사진은 반영이 최고 인것 같습니다.

남원 광한루의 반영을 조금 담아 왔습니다.

 

광한루는 원래 1419년 황희 정승이 남원으로 유배되어 왔을 때 "광통루"란 작은 누각을 지어 산수를 즐기던 곳이다. 이후 세종 26년(1444)에 하동 부원군 정인지가 이곳의 아름다운 경치에 반해 달나라 미인 항아가 사는 월궁속의 '광한청허부'를 본따 '광한루'라 바꿔 부르게 되었다. 광한은 달나라 궁전을 뜻한다. 춘향과 이몽룡도 바로 이곳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맺게 되었다. (보물 제 281호)

 

광한루가 다른 누각과 비교할 수 없는 점은 조선후기 문예부흥기라 불리 우는 영정조시대에 창작활동이 활발하여 판소리계 소설 <춘향전>의 무대이며 국악의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주지의 사실이다.

 

광한루원에는 광한루, 영주각, 방장정, 완월정, 춘향관, 춘향사당, 오작교, 월매집이 있다.

 

 

 

 

 

 

    오작교는 해마다 칠월 칠석이면 견우와 직녀가 만난다는 안타까운 천상의

    사랑을 춘향과 이몽룡을 통해 완성시킨 사랑의 다리입니다.

    다리도 아름답지만 물밑 그림자는 더 아름다운 곳이 이곳이 아닐까 합니다.

 

 

 

 

 

 

    *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어찌 사랑을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

 

 

   천년을 뛰어넘는 사랑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광한루

   발목을 잡는 반영, 매력적인 광한루원에서 발길을 옮기지 못하고 한동안

   과거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여름날의 향적봉 풍경

 

팔월의 어느 날 덕유산 향적봉에 올랐다.

향적봉에는 주목이 많이 자생하고 있다.

주목은 나무 줄기가 유난히 붉어 붉을 주(朱), 나무 목(木)자를

써서 주목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대부분 해발 1,000m가 넘는 높은 산에서 자생하며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을 산다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향적봉은 겨울 설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지만 여름날의 향적봉의

주목은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한 여름날의 열기로 불쾌지수 빨간기둥은 끝없이 오르고

타는 목은 얼음 생수로도 감당하기 힘든 날,

그래도 첫눈에 반하는 사람이 있듯이

그날 난 첫눈에 주목을 사랑했다.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 우리네 사랑도 주목의 반만 하더라도

후회는 없지 않겠는가.

주목의 고목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지금까지 걸어온 한걸음, 한걸음의 추억보다는

천리를 간다는 매화향기처럼

진솔한 삶의 향기를 피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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