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착과 집착의 차이 / 임 현택
이사하는 날. 간밤부터 눈이 내렸다. 이삿날 눈이 오면 부자가 된다는데 밤새 세간위에 소복하게 쌓인 걸 보며 왼지 새 보금자리에 대한 희망적 기대가 부풀었다. 이삿짐을 꾸리기도 전에 식구들에게 천대를 받던 텔레비전, 이사를 오면서 식구들 성화에 신형으로 교체하고픈 마음에 가전제품 매장엘 갔다.
발걸음을 잡는 대형벽걸이 평면 텔레비전은, 티 없이 깨끗한 화질과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음향은 한동안 우릴 머물게 했다. 액자처럼 손쉽게 벽에 걸 수 있는 벽걸이 TV 시대가 열려 벽에 걸 수도 있고, 스탠드를 이용해 세워서 설치할 수도 있어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연출할 수 있었다. 대형화면에 펼쳐지는 화면과 웅장하게 울려 퍼지는 서라운드 음향,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 간 식구들은 온갖 기능에 매료되었다. 매장 도우미는 알 수 없는 용어들을 쏟아내며 홍보하느라 목에 핏대를 세운다. 다기능 화질역시 현장에 있는 것처럼 생동감 있었으므로 구매하고 싶은 욕망이 충동질했지만 만만찮은 호가에 다른 가전제품만 구입하고, 정작 TV는 눈요기로 끝내고 말았다.
거실가운데 떡하니 폼 잡고 있는 낡은 텔레비전 앞에서 식구들은 차가운 바람이 인다. 아직 멀쩡하지만 리모콘도 없는 구형, 만능 리모콘으로도 작동되지 않는 낡되 낡은 TV. 채널을 한번 바꾸려면 손으로 꾹꾹 눌러야 하는 번거로움에 처음엔 신주단지 모시듯 했다가 지금엔 귀찮은 고물취급을 받는다. 재활용상가에서도 회수를 거부한다는 국보급 이제는 손때가 묻어 강력 세척제로도 닦이지 않다보니 빛바랜 노트와 흡사하다.
그 구닥다리 옛TV에서 때맞추어 진품명품이란 프로가 방영 중이었다. 오래된 그릇이다. 겉보기에는 별것 아닌 듯한데 몇 백 만원이나 되는 거액이다. 어디서 많이 보아왔던 저 흔했던 그릇. 예전에 꿀을 담거나 고춧가루 등을 담았던 것들이 백자니 청자니 이름 붙여져 고가로 매겨진다. 나는 ‘옳거니 이때다’싶어 아이들에게 옛것에 대한 존귀함을 역설했다. 침이 마르도록 설명했지만 아이들의 냉랭한 표정은 나의 자구적 변명이라는 걸 읽고 있는 모양이다.
사실 말이지만 나는 옛것에 대하여 병적으로 애착하고 있다. 사라저가는 것들의 고전적 가치보다도 옛것에서 풍기는 잔잔하고 은은한 고풍이 나를 감흥 시키는 것이다. 이 나이쯤 되는 사람들은 복고보다는 동양적 정서가 물씬 풍기는 고전 쪽에 마음이 간다.
아파트 도어를 사방무늬 문살에 닥나무 창호지를 바른 옛 문으로 개조해 달아 놓았는가 하면, 거실에는 항아리, 뚝배기, 화로 등 골동품으로 장식을 해놓았으니 나의 괴팍한 고전풍은 애착이라기보다 집착에 가깝다 해야 옳지만 우리나라의 보물들이 거지반 오래된 옛것들이 많은 걸 보면 집착보다는 애착이 맞을 런지도 모른다.
자고로 술도 오래된 술이 좋고, 친구도 옛 친구가 좋다 하였다. 낡고 때가 고질고질 묻었지만 투박하나 소박함이 깃들고, 아련하게 전해지는 평온함과 여유로움이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준다. 남들 눈에 이것이 궁상맞다던가. 빈티로 느껴질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정신적 안정의 새암 같다.
사람이나 물건들이 애착에서 끝나야 좋을 텐데 쉬이 버리지 못하고 끌어안고 끓이는 버릇이 몹쓸 나의 집착이다. 물론 고리타분한 헌것들만 고집하는 사람들이야 있겠냐만 적어도 쓸 수 있는 것들을 함부로 버리는 것도 결코 좋은 버릇은 아니다. 글쎄……. 헌것을 버리고 새것으로 바꾸는 사람은 똑똑한 사람일 테고, 낡고 오래되었지만 정성스레 닦고 고쳐 쓰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닐까.
유년시절엔 흑백텔레비전 앞에 동네아이들과 이불을 뒤집어쓰고 당시 인기프로인 ‘전설의 고향’을 보던 아릿한 향수, 고무줄놀이에 빠져 있다가도 드라마 할 시간이면 모두들 TV 앞으로 달려갔다. 이불속에서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숨소리조차 죽일 정도로 몰입하며 우린 성장했다. 또한 세상사를 보았고 판도라상자처럼 모든 재앙을 날려 보내며 희망을 얻는 미래에 대한 꿈도 키웠었다.
아련한 옛 추억이 담겨져 있는, 또 옛 연인과 같은…….
난 고물 텔레비전을 끝내 버릴 수 없을 것 같다.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