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표 파자마 -- 임현택

 

 그날의 기억이 또렷하다. 수업 중 교수님의 사담이 진종일 머릿속을 술회한다.

칠순을 넘어선 아내가 요즘 고고한 취미에 빠지셨단다. 얼마나 열정인지 남편은 뒷전이고 끼니도 제때 드시지 못한다. 그간 다니던 노래교실, 탁구교실, 스포츠댄스도 뒤로하고 재봉질에만 심취하였다.

여자는 결혼하면 거대한 공동체가 된다. 모르는 사람끼리도 금세 속내 이야기를 터놓고 마음을 공유한다. 공통된 고민이나 자식 문제 등 이야기를 풀어 놓기만 하면 거리가 좁혀지고 금세 서로를 이해하고 정보도 교환한다. 교수님의 아내도 함께 취미생활을 하시던 친구들과 새로운 도전인 재봉질을 배우며 또 하나의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그림처럼 고요한 집안에 울려 퍼지는 교수님댁의 울림, 눈도 침침한 나이에 배운 아내의 재봉소리 이다. 서로 경쟁이라도 하는 듯 열심인 아내와 친구들은 신문지에 크기와 종류별로 옷본을 뜨고, 잘 보이지 않는 바늘에 실을 꿰고 아픈 허리를 곧추 세우며 만들기에 심취 한다.

 

첫 작품, 남편인 교수님의 파자마였다. 땀 흡수가 잘되고 바람이 잘 통하는 헐렁한 바지가 파자마라 하지만 앞, 뒤가 분명 구분이 돼야 하는데. 초보수준에 앞뒤가 없는 파자마를 입고 생활하기에 매우 불편하지만 아내의 성의와 정성 때문에 불편함도 감수하고 입었다. 단돈 몇 푼이면 다양한 색상의 사이즈를 마음대로 골라 입을 수 있으므로 불만을 토로 하고도 싶어 내심 도중 포기하기를 소원했다.

 

친정어머니의 유품인 재봉틀, 그의 아내에겐 무엇보다 애착이 심했던 물건이다. 겉모양만 봐서는 바늘이 움직이기나 할까 염려가 앞선 낡은 재봉틀, 아내만큼 세월을 먹어 부속품 구하기도 힘든 박물관 유물 급이다. 행여 고장이라도 나면 잠도 못 이루고 고치지도 못하면서 전전긍긍 수리기사가 오기까지 재봉틀에 매달린다.

 

칠순을 넘어선 아내, 좀 쉬고 있으면 좋으련만 집착인지 애착인지 친구들과 오기와 끈기로 이룬 성과로 이젠 제법 앞, 뒤가 구분된 파자마를 척척 만들어낸다. 공장에서 만들어낸 제품과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의 작품이다. 수선 집처럼 방안 여기저기 흩어진 천 조각과 돌돌 말아진 신문지의 옷본, 발끝에 매달려 다니는 실오라기들 때문에 집안이 어수선하다.

  대문 밖이 저승길이라는 노인들의 안부, 서로의 안녕을 확인하고 새로 만든 할머니표 파자마를 자식이나 손자들에게 주는 기쁨으로 만든다. 만약 혼자 만들었다면 이런 저런 핑계거리를 만들어 진작 포기를 했을 터. 동행인이 없고 그 일에 흥미가 없다면 과연 제대로 된 파자마가 만들어졌을까

 

아침운동 나서기가 꾀가 나는 날씨다. 침상머리에 파자마를 개어놓고 산행에 나선다. 강산이 일곱 번도 더 바뀐 나이, 산행에 힘이 부치고 그럴 때면 재봉틀 소리가 들리는 듯 하다. 한때는 볼멘소리로 투덜거렸지만 봉제에 무지를 딛고 이룬 아내의 성과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서툴고 더디지만 마지막 박음질에 흘러내리는 아내의 땀방울, 지치고 힘겨운 산행에 구슬땀과 같지 아니한가.

 

실버시대, 노래교실이나 탁구교실 스포츠댄스도 노후의 즐거움이지만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자기가 좋아하는 놀이가 아닌 자잔 한 소일을 하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끼며 지혜롭게 살아가는 노부부의 삶은 화려하지도 않으면서 그윽한 국화향기 같다.

이젠 다른 파자마는 불편하단다. 아내 표 팬티와 파자마가 으뜸이라며, 바지라도 벗어 자랑하고 싶다는 노교수님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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