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루나무가 있는 풍경 / 임현택
쑥뜸 연기가 뽀얗게 피어오른다. 교통사고로 허리부상을 입은 후 매일 베란다에 엎드려 쑥뜸을 지겹도록 뜬다. 등 마사지를 하고 뜸을 뜨면 온몸이 불구덩이에 빠진 듯 한 열기 때문에 눈을 질근 감고 이를 앙다물어야 했다. 아픔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고 시선은 멀리 창문을 넘어 미루나무에 닿는다. 하늘을 찌를 듯이 서있는 언덕위의 키 큰 미루나무를 바라보며 달아오른 열을 식힐 때면 친정아버지 생각이 난다. 창문을 열면 변함없이 다소곳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미루나무. 꼭 아버지 닮은 미루나무다.
꿈 많던 학창시절. 하늘을 향해 손을 벌린 미루나무의 무성한 가지마다 매미들이 목이 터지도록 울어대는 가로수 길을 아버지는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십리 밖 중학교에 등하교를 시키셨다. 하루에 서너 차례 왕복하는 완행버스는 늘 만원이었다. 설령 버스에 몸을 실어도 발이 허공에 뜰 정도로 콩나물시루였으므로, 아버지는 딸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다 못해 아예 당신이 자전거로 등하교를 시켜주신 것이다.
신작로 자갈길은 움푹 파이고 구부렁하여 자전거는 갈지자로 춤을 추었고 쿵덕쿵덕 연실 엉덩이는 방아질이다. 신작로 길섶에 모여 막걸리로 목을 축이는 어르신들, 아버지 등에 매미처럼 등에 기대고 있는 나를 볼 때마다 주름 깊게 웃으시며 "핵교 가냐? 어여 댕겨와" 하셨고 흐뭇하신 아버지는 자전거 패달을 힘차게 밟으셨다.
솔직히 사춘기인 난 아버지가 태워 주시는 자전거 보다는 발 밟히고 옷이 구겨져도 만원버스를 타고 다니고 싶었다. 땀 냄새 진동하는 틈바구니에 끼어도 은근히 남학생들한테 쪽지도 받아보고 싶었다. 왜 아버지가 호기심 많은 내 마음을 모르셨겠는가? 투정이 봇물처럼 쏟아져도 당신은 아랑곳없이 마냥 행복하셨던 모양이다.
민방위 가상 훈련시간, 경보 사이렌 소리가 울리면 우리는 미루나무 울타리 밑으로 대피를 했다. 훈련은 뒷전이고 오리처럼 엉덩이를 쭉 빼 놓고 쏘곤쏘곤 사춘기 꿈은 날개를 편다. 그 짧은 시간에도 물이 오른 미루나무가지를 툭 꺾어, 호드기를 만들어 불다 감독에게 걸려 손 들고 벌서기가 일쑤였다. 뭉쳐서 벌을 받으니 그 또한 수다를 떨 수 있는 기회이니 민방위 훈련은 오히려 우리에겐 맛깔 나는 별미였다.
미술시간. 학교옥상 위로 너울거리는 미루나무를 그릴 때도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나 보기가 역겨워...'시를 낭송하노라면 미술시간인지 국어시간인지 헷갈렸지만 사춘기 소녀의 꿈은 날개 달은 듯 문학의 씨앗을 뿌렸다. 가만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나의 문학수업이 시작되지 않았었나 싶다.
주말이면 툇마루에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지고는 뒤도 돌아보지도 않고 매미를 잡으러 나섰다. 긴 작대기 끝에 양파 망을 묶은 매미채가 대문 빗장에 늘 걸려 있었다. 미루나무가로수 길을 몇 바퀴 돌아 그림자가 길게 그려진 시각에야 양손에 매미와 넝쿨딸기를 들고 콧노래 부르며 대문을 들어섰고, 잡아온 매미를 아버지와 툇마루에 걸터앉아 바늘로 찔러 곤충채집을 한다. 매미의 일생이 보름이라는 사실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누가 더 많이 잡아 상자에 채우느냐가 우리들 사이의 내기였다. 교복은 논 한가운데 서 있는 허수아비처럼 얼룩덜룩하니 품바 꼴이다. 어머니는 "가시내가 망아지처럼 교복도 벗지 않고 어딜 그리 싸 다니냐" 고 역성이다. 아버진 헛기침을 하시며 "그려 잘못했구나" 하시지만 눈길엔 미소가 가득 담겨져 있었다.
한 잎 한 잎 날리던 색 바랜 이파리는 어느새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다. 얼기설기 달빛 새는 성근 까치집 한 채가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고 있다. 그 많던 미루나무는 모두 어디로 갔을까? 양 팔을 벌리면 손끝이 닿을 것 같은 신작로도 사라지고 까치집도 이제는 볼 수가 없다. 사춘기소녀의 무지개 꿈도 사라지고 찬바람만 휭 하니 분다. 눈을 감으면 들릴 것 같은 개구리 울음소리, 미루나무 이파리의 사각거리는 소리가 그리워진다. 그리고 아버지의 자전거 소리도 가슴을 파고들어 온다.
온 베란다에 퍼진 쑥뜸 냄새, 뻐근한 허리를 움켜쥐고 일어나 전화를 집어 들었다. 아직도 사고소식을 듣지 못한 아버지는 여전히 자식이 뭔지 걱정이 앞선 모양이시다. 그저 건강이 최고라 하신다. 언제나 포근하고 편한 아버지는 미루나무와 같으신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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