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막이옛길 ㅡ수월정



괴산댐건설로 수몰되어 이곳으로 이건하였다.





* 괴산 수월정 *

괴산호(산막이옛길) 가운데 산막이 마을 안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로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수신(1515∼1590)이

유배생활을 하던 곳이다. 후에 건물명을 수월정(水月亭)이라 하였다.

노수신은 중종 38년(1543) 과거시험에 합격하여 이황과 같이 학문을 연구하다가 정권다툼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다.

순천, 괴산 등지에서 귀양살이를 하다가 선조 즉위 후 다시 관직에 올라 영의정에까지 오른 인물이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 수월정 *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원래 다른 자리에 있었으나 괴산댐 건설로 인해 수몰위기에 처하게 되자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괴산호의 멋진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연하구곡의 하나인 병풍바위가 잘 보인다.

산막이 옛길을 통해서 올 수 있다. 출처- 한국관광공사



* 비석 *

문간공(文簡公)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유허를 알려주는 표지석으로 여겨진다.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의 오른쪽에 방이 있다.

대청마루에서 방으로 들어가는 문은 접어서 들어 열수 있는 사분합문(四分閤門)으로 된 구조다.

필요시 방과 마루를 하나의 공간으로 쓸 수 있도록 했다.












* 노수신 *

대윤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올랐으나, 정여립(鄭汝立)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다. 이황·기대승 등과 주자의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을 놓고 논쟁을 벌였다. 본관은 광주. 자는 과회,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아버지는 활인서별제를 지낸 홍(鴻)이다.

장인인 이연경(李延慶)에게 배웠으며, 휴정 등과 사귀면서 불교의 영향도 받았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한 뒤 전적·수찬을 지냈다.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 했다. 대윤에 속하여 인종 즉위 초에는 정언을 지내면서 소윤(小尹) 이기(李芑)를 탄핵하여 파직시키기도 했다.


1545년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문정대비(文定大妃)가 수렴청정을 하자 대비의 동생인 윤원형(尹元衡)을 비롯한 소윤이 정권을 잡은 뒤, 윤임(尹任) 등의 대윤을 제거하기 위하여 1547년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는 소윤계열인 윤춘년(尹春年)과의 친분으로 죽음은 면했으나, 이조좌랑에서 파직되고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1547년(명종 2) 정황(丁熿)과 함께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탄핵을 받고 진도로 옮겨 19년간 귀양을 살았다.


1565년 괴산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1567년(선조 즉위년)에 풀려나 교리·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을 지내고, 1573년 우의정, 1578년 좌의정, 1585년 영의정이 되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직하고 영중추부사가 되었다.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한 일이 문제되어 대간의 탄핵을 받고 파직 당했다. 출처- 다음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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