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전자가 들려주는 하모니-- 임현택

 

폭폭폭 달그락 거리며 연속적으로 울리는 소리. 우리 집 주방에서 들리는 하모니다. 하루에 한 번씩 영락없이 들리는 연주다. 아니 결혼이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연주를 들었다. 물이 가득하면 많은 김을 한꺼번에 내 뿜지 못하므로 삐삐삐 하고 글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묘한 피리소리를 들려주기도 한다.

 

무서리가 내리기 시작하면 말린 느릅나무를, 한여름 가마솥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면 황기나 대추를 먹고는 가스렌지 위에서 낡은 스텐네스 주전자가 연주를 한다. 세월에 떠밀려 내 눈언저리에 잔주름이 늘어 가는 것처럼 반짝반짝 탱탱하던 스텐네스 주전자, 이젠 허리 살이 늘어진 늙은 호박처럼 빛을 잃었지만 연주만은 예나 지금이나 일품이다. 주방 한쪽 구석에 오래된 바구니에 얼마 남지 않은 느릅나무껍질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 지금은 계시지 않지만 철부지 막내며느리를 감싸던 시아버지가 선하게 그려진다.

낙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시아버지는 느릅나무 껍질을 지게 가득 채집하여 겨우내 말리셨다. 그렇게 말린 느릅나무껍질을 산나물 들기름 참기름 등 고분고분 챙긴 보퉁이와 함께 안겨주셨다.

 

느릅나무껍질을 유근피(楡根皮)라 한다. 유근피는 비위(脾胃)의 여러 질환 중에서도 특히 위궤양, 십이지장궤양, 소장과 대장 직장 등 여러 궤양에 탁월한 효과를 내며 강력한 진통제가 함유 되어있고, 소염과 항균작용을 한다고 동의보감에도 기록 되어있다. 또한 이뇨작용을 도와준다고 하여 예로부터 음용수로 마셨다. 문명이 발달했지만 민간요법으로 느릅나무뿌리껍질을 찬물에 하룻밤 동안 담가 두면 우러나오는 진을 피부에 바르면 살결이 매끈매끈하게 윤이 나고, 여드름이나 특히 아토피성 피부염 과 무좀 등 피부질환에 바르면 우수한 효과를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느릅나무는 종기와 종창에 하늘이 내린 신약(神藥)이다. 라고 표현을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이처럼 귀한 나무껍질 인데 5살 7살 조카들이 오는 날이면 “이모, 하얀 물 주세요.” 한다. 태어나면서부터 정수기물에 입맛이 길들여진 아이들에겐 느릅나무껍질을 넣고 끓인 물이 텁텁하고 갈색인 게 무슨 약물같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입 안 가득 한입물고는 넘기지 못하고 미간만 찌푸리는 게 마시기엔 무리인가 보다.

'양반 대추 한 개가 아침 해장'이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몸에 이로운 대추와 땀을 많이 흘려 허한 원기를 보호 해 주는 황기를 끓인 물로 여름을 보낸다. 이렇게 가끔은 오장을 보호 해 주는 약재를 구입해 끓여 마시기도 한다.

 

주위사람들은 정수기가 없는 우리 집에 오면 시골 때를 벗지 못한 촌스러운 “괴산댁, 촌닭”이라 한다. 딱히 몸에 이롭답다는 이유로 물을 끓여 마시는 게 아닌, 오래입어 빛이 바래고 소매 끝이 낡아 헤지고 늘어졌지만 그 옷이 편해 늘 손이 가는 그런 연유인 거다.

흙벽돌집이 귀한 대접을 받는 요즘현실 귀한 흙벽돌은 그야말로 전원주택에서나 볼 수 있을 뿐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콘크리트 빌딩숲에 서 자연을 멀리하고 살아간다. 아토피에 시달리는 아이들, 새집 증후군에 몸살을 앓는 사람들이 늘어간다. 그러면서 다시 자연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편리보다는 건강을 위해 공기 중에 유해물질을 분해하는 능력이 있는 관엽 식물을 기르기도 하고 물을 끓여 먹는 가정들이 증가한다고 한다. 느릅나무가 아토피질환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도시 젊은 주부들은 시골 어르신께 미리 선 구매를 계약하기도 한다. 

 

시간이 금인 현대인들 당연 끓여 마시는 식수보다 정수기가 필수품으로 가정이나 사무실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휴대하기 편한 생수고 보니 인기가 좋다. 생수가 처음 공장에서 시판 될 때 그 흔한 물을 사먹는다는 게 사치스러워 보일뿐더러 과연 물을 사 먹어야 하는가 하는 의아심도 있었다. 먹는 샘물이 국내에 첫 시판된 1995년 5월 이후로 생수의 판매량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시대가 변한 요즘은 생수가 시판 된지 불과 15년 정도 역사를 두고 있는데 맨 앞쪽에 자리 잡아 가장 많이 팔리는 음료 대열에 들어섰다고 한다.‘물을 물 쓰듯 흔하게 쓴다는’ 말은 이젠 교과서 속에 한 구절로 자리 잡을 뿐이고 이젠 우리나라도 "UN이 정한 물 부족 국가" 이다.

 

늦은 오후, 낡은 스텐네스 주전자의 달그락 거리는 뚜껑소리에 맞춰 하모니가 시작된다. 하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주전자 꼭지에서 멀어져간 추억 하나를 떠올리며 사색에 빠져든다. 시아버님이 가신지 어언 십여 년이 흘렀다. 약재상에서 사온 느릅나무 껍질이다. 비록 그분이 채취해주신 느릅나무껍질을 달이는 것이 아닐지라도 주전자뚜껑이 내는 하모니를 들으면 자상하시고 인정 많던 시아버님 생각이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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