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구니 가득한 그리움 / 임현택
신 새벽 희미한 안개 속으로 햇살이 부서진다. 등산화 끈을 질끈 매고 산행 길에 오른다.
길갓집 감나무가 담 너머로 손을 쭉 뻗어 내밀고 있다. 애석하게도 옛날 기와를 얹은 한옥은 문짝이 떨어져 바람에 흔들리고, 마당엔 망초대가 자라고 있는 비워진 고가다. 기와 한 장 한 장속에 이런저런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터, 반쯤 열려진 대문을 밀고 들어섰다. 작은 마당한가운데 감나무 이파리 사이로 햇살이 쏟아져 내린다. 뒤뜰 장독대엔 깨진 독이 덩그마니 세월을 먹고 있다. 마당앞쪽 돌과 흙이 아닌 시멘트로 발라져 있는 석빙고 문고리에 묻혀버린 시간 속에서 외가댁의 안방 벽장이 눈에 연상되더니 어느새 가슴속에 자리 잡은 기억 저편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외아들 외딸이신 부모님은 뒷집에 외가를 두고 신접살림을 차리셨다.
대문이 5개나 되는 한옥 외가, 안채와 사랑채, 곡간이 따로 있고 마당한쪽에는 외양간도 있었다. 딸부자집인 우린 동네 아이들과 외가댁이 놀이터였다. 외가와 본가로 폴짝거리며 대문을 뛰어 넘을 땐 꽃무늬 짧은치마가 엉덩이를 살짝 드러내곤 했다.
곳간에 숨어 숨바꼭질 할 때면 생쥐와 눈이 마주쳐 서로 놀라 아우성치며 도망치곤 했다. 안채와 사랑채로 줄달음치느라 콧등에 구슬이 흘러내리고 벌겋게 익은 볼이 탱탱하게 빛을 내면, 대청마루에 누워 홍알홍알 끝없는 이야기가 담을 넘어간다. 부뚜막에 걸린 무쇠 솥에서 하얀 김이 오르면 아이들은 뒤뚱뒤뚱 오리걸음으로 아쉬운 발길을 집으로 돌린다.
긴 그림자가 외양간에 걸릴 때면 외할아버지는 “워워” 방목했던 어미 소를 앞세우고 송아지는 어미꼬리 끝에 그림자처럼 따라온다. 어미 소가 둥지를 틀고 산자락에 떨어진 해를 보면 집이 아닌 외가안방으로 앞 다투어 들어갔다. 구진 할 때면 무엇이든 토해내는 도깨비 방망이 같은 아랫목 벽장은 마술저장고였다. 외할머니는 늘 맏손녀인 언니 손에 먼저 주전부리를 쥐어주셨다. 욕심 많은 난 강짜를 부리면서 먼저 달라고 악을 쓴다. 그럴 때면 무명치마를 걷어 올려 고쟁이에서 사탕을 꺼내 살며시 손아귀에 쥐어주셨고 난 금 새 곰 살스럽게 변하곤 했다. 욕심이 눈도 마음도 가리다 보니 언제나 내손에는 주전부리가 가득했다.
첫닭울이보다 외할아버지 기침소리가 먼저 아침을 연다. 사랑채 대청마루 창을 활짝 여시곤 곰방대에서 솔솔 연기 꽃을 피우신다. 순 담뱃잎을 곰방대에 꾹꾹 눌러 담아 불을 붙여 하얀 연기를 뿜어내면 신기하지만, 어찌나 독하던지 그런 외할아버지 옆에 가기를 싫어했으니 당연 외할머니 치맛자락에 매달릴 수밖에, 더위를 달래려 감나무그늘 들마루에 누워 외할머니의 구수한 옛날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하늘로 훨훨 날아간 이야기는 솜뭉치 같은 구름 속에 천상을 만들어 쉬어가고, 천둥치고 파도치며 거센 물살이 잔잔한 강에서 무지개를 만드는 옛이야기 속에 빠진 우린 어느새 잠속으로 솔솔 젖어든다.
아들을 낳으면 비단이불위에서 놀게 하고, 딸이면 맨바닥에서 놀게 했다는 구전도 있던 그 시절 나부대는 딸들이 어여쁠까! 어쩜 어머니는 죄인처럼 사셨을 게다. 유년시절을 외가에서 지낸 우린 어머니보다 외할머니 품이 더 좋았던 그때가 아련하게 밀려온다. 요즘 아이들은 고쟁이나 구경했을까? 한옥의 아랫목이나 알까?
고향, 오래전 땅속으로 묻혀 진 외가 집의 한옥은 검은 돌담만이 감나무그늘아래에서 세월을 달래고 있다. 텃밭으로 변한 집터엔 감자 꽃이 하얗게 손을 흔들고 더 이상 개울가엔 노니는 소도 볼 수 없고 방천도 콘크리트로 단장돼 있다. 구불 한 논두렁, 밭두렁도 아련한 추억 속에 자리 잡을 뿐 농지개량으로 바둑판이 된 전답들은 추억을 삼켜버렸다. 신작로는 반듯한 아스팔트로, 농수로는 자동수문을 달아 현대화 되었다. 아담한 초등학교는 이미 폐교 되었으며, 이젠 모두가 가슴속에 추억으로 자리 잡았을 뿐이다. 흔적을 찾을 길 없음에 포도주 같은 달콤함보다는 곡주가 그리워 허전한 마음을 끌어안아 올렸다.
하얀 머리카락이 하나, 둘 자리 잡고 잔주름마저 깊어지는 지명을 앞에 두니 더욱더 고향냄새가 그리워짐 산행을 멈추고 돌나물을 가득 뽑아 발길을 돌렸다. 흙과 거름을 구하기 위해 야생화화원 들렀다. 주인장은 바람 숭숭 빠지는 마포바지에 더위를 쫓고 있는 게 아닌가. 깊은 주름에 풍기는 외할아버지 냄새를 얼른 주머니 가득 담았다. 토분 속에 대청마루추억도 돌나물 포기마다 꾹꾹 눌러 심었다.
지루한 긴 장마와 폭염, 대청마루에 누워 서까래 안쪽에 진흙으로 쌓아 올린 몽글몽글한 집속에 제비식구들의 조잘거리던 고향이 더 그리워진다. 혹여 불어오는 실바람에도 고향냄새가 묻어오지나 않을까. 메아리로 다가오는 고향, 고향을 그리며 돌나물을 품에 안고 먼 하늘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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