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택 (아리수) 2013. 6. 26. 21:13

사오정 사내 - 임현택

 

농로 갓길 저수지표지판이 보인다. 밤 수확 철이 지났음에도 밤을 주을 요량으로 한적한 시골을 찾았다. 구부정하게 서있는 낡은 양철 판에 매직으로 후려 쓴 퇴색된 희미한 표지판을 따라 가보니 작은 저수지에 다 달았다.

 

깊게 눌러쓴 사내의 모자 뒤로 빠져 나온 흰머리는 노인의 문턱을 넘어서고 있는 것 같다. 낚시 대 두 개를 걸쳐놓은 소탈한 행색은 낚시엔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가끔씩 빈 찌를 거둬 올려 지렁이를 꿰어 던진 사내는 주위 시선을 무시한 듯 무미건조한 표정으로 찌만 바라보다 마른세수를 한다.

 

최첨단제품이 봇물 터지 듯 밀려 나오는 시대 사내와 함께 걸어온 세월이 덕지덕지 묻은 구식 트렌지스터 라디오가 사내 옆에 비스듬히 기대여 졸고 있다.

안테나를 뽑아 올리고 전파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데 산중이라 전파가 타질 않는지 손바닥 안에서 지직 울어대는 모습이 마치 딸린 처자식들의 닦달인 듯싶다.

 

밤 수확이 끝나고 누군가 훑고 지나간 자리를 이삭 줍듯 주우면서 낚시터도 아닌 저수지 가장자리 무심하게 앉아있는 사내에게 자꾸 시선이 쏠린다.

주중에 한가롭게 낚시 하는 이들은 대부분 ‘사오정 시대’의 주인공이다. 사오정은 45세 정년퇴직을 뜻하는 '사오정'과 56세 정년 퇴직자는 도둑이라는 '오륙도'라는 신조어다. 저 사내도 사오정의 주인공인가 싶어 안쓰러움 마음을 안고 우리 일행은 자연스레 낚시 하는 곳으로 몰려갔다.

 

짧은 순간 몸의 언어를 읽어 본다. 얼굴과 목덜미는 검게 그을렸지만 매끄러운 손가락이 도회지에서 온 듯하다. 비닐봉지에 쓰레기도 가지런하게 담아 주변 정리를 한 것이 예사로워 보이질 않는 것이 권위적인 사회생활을 해온 듯 풍긴다.

 

‘들은 귀는 천년이요 말한 입은 사흘이다’이라 했다. '사오정 시대' 이 한단어가 몰고 온 우리 사회의 변화는 실로 엄청나다

 

사회각계 비리가 만연하고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이기주의가 판치는 현실 외려 덕이 있는 자들이 외면당하는 시대다. 현실은 평생직장이란 없다. 직장인들의 고용환경은 불안과 불확실성 그들을 거리로 내 몰고 있다. 사오정처럼 잘 알아듣지 못해 엉뚱한 언행을 하듯 이 옭아매는 현실에서 벗어나고 싶지는 않았을까 물음표를 던지고 싶다

 

다혈질성격의 소유자인 친구의 남편, 유능한 중소기업 간부였으나 중견간부양성교육과정에서 누락되면서 전문지식을 습득하기보다는 우울증에 빠져 명퇴자인 사오정이 되고 말았다. 마치 밤나무 아래는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듯 으깨진 밤송이 짓밟힌 잡초처럼 처참한 광경처럼 현실은 그러했다.

몇 년을 ‘내가 왜? 하필이면 나에게’답 없는 물음으로 자멸감에 허우적대는 동안 친구는 보험회사에 입사에 생계를 꾸려 나가야 했다.

 

‘남자는 태어날 때부터 머슴’이란 말이 있다. 이런 우스갯소리 이면엔 남자들의 의무감 책임감 때문에 빚어진 말이 아닐까! 그런 끝없는 친구의 헌신적 노력으로 친구남편은 보험회사 함께 다니며 새 생활을 재개했다.

 

자연에서 스스로 살아가는 법을 배운 민물고기는 수시로 변하는 수위조절과 다듬어지지 않은 물속에서 민첩하게 환경조건에 맞춰 살아간다. 반면 양식고기는 시간 맞춰 주는 사료에 길들여져 주인의 발소리를 듣고 살아가는 법을 익힌다. 민물낚시엔 지렁이 양식낚시엔 떡밥이 제격인 것처럼 권위보다는 능력과 합리적으로 현실에 적응해 가야 한다.

 

쭉정이만 남아있는 앙클한 밤송이를 뒤적이는 동안 내 삶을 돌아 본 시간이 되었다. 사오정 사내의 쓸쓸한 뒷모습이 붉은 노을 그늘에 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