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나들이
지나간 어느 봄 날에 흔적을 더듬으면서~~
봄나들이--임현택
새 옷으로 갈아입느라 산과 들이 온통 아픈 계절이다. 무채색의 철을 지나 처녀의 볼처럼 군데군데 붉은 빛이 돌더니 소소리바람이 훑고 지나가고, 빈 가지가 향기 짙은 꽃잎으로 휘어진다. 수많은 근심을 길 위에 내려놓고, 부질없는 욕심도 거기에 내려놓아 온몸에 성한 데라곤 없는 벚꽃을 내려다본다. 저 꽃과 눈높이를 맞출 수도 없으면서 나는 꽃 이파리를 걱정한다. 떨어진 꽃처럼 고달플 때마다 헌 옷가지 버리듯 고단함을 하나하나 벗어 던졌다고 믿었다. 버렸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마음이 편안하다고도 믿었다. 내 몸뚱이를 돌보지 않고 아니 그보다는 늘 건강하리라는 턱없는 믿음으로 산 덕분에 가뭄에 바닥을 드러내는 저수지처럼 가뭇없이 나의 존재가 사라져 가고 있는지도 몰랐다.
고양이가 양지쪽에 앉아 졸기에 딱 좋은 봄 어느 날, 나는 앉은뱅이책상 컴퓨터 앞에서 아픈 배를 움켜쥐고 뒹굴었다. 새우처럼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실려 간 병원. 몸이 도대체 왜 이럴까. 식은땀과 함께 초조해진다. 순간이지만 시골에 계신 부모님의 얼굴과 남편 그리고 몇몇 친구들의 얼굴이 구겨진 영화필름처럼 핏기 없는 모습으로 스쳐간다. 그리고 병원. 통증으로 움츠려 있던 세포들은 해진다.
‘병은 말을 타고 달려와 거북이처럼 기어나간다’더니 번개처럼 달려온 통증은 온몸을 후벼 파고, 진통제를 맞았음에도 엷은 입술 사이로 터져 나오는 신음은 멈출 수가 없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안으로 자꾸만 삼키는 통증의 침상. 이 좋은 봄날에 이 무슨 시튜에이션인가. 내 침상으로 쏟아지는 수많은 눈. 낯선 사람에 대한 약간의 경계심과 또 약간의 호기심으로 쏟아 붓는 시선을 외면한 채 눈을 감았다. 그렇게 아픔을 끌어안고 약에 취해서 시든 꽃처럼 잠에 빠진 병실에는 어디에서 날아왔는지 알 길 없는 눈길은 바람을 타고 환자들의 가슴과 가슴으로 내려앉고 있었다.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야 할 상황이건만 서로를 외면하는 이 쓸쓸함. 차라리 모르는 척 지내기를 내심 원하고 있는 듯하다. 그렇다고 데면데면하게 행동할 나도 아니기에 그저 생각의 꼬리만 끊이지 않을 따름이다.
거울에 되비치는 데꾼 한 낮 빛에 흠칫 놀라고 절로 한숨이 새 나온다. 시선이 멈출 곳을 찾던 나는 밤톨 같은 두 살 박이로 인하여 입을 열게 되었다. 엉덩이를 커다란 기저귀로 감춘 채로 발치에서 주절주절 쫑알대는, 탈장 수술을 한 그 아이의 예측할 수 없는, 순진한 눈망울 때문에 눈에 익숙해진 주위사람들과 말문을 트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제까지와는 다른 세상이 열리는 듯했다. 옆의 침상에 누워있는 아주머니들이 오래 담 하나 사이에 두고 살아온 이웃 같았다.
맹장수술을 한 중년 여인은 검은깨를 뒤집어쓴 얼굴에 일복이 많으면 돈복도 많다던데 일복만 타고 났다며 사기 깨지는 음성으로 신세타령을 쏟아낸다. 통증은 사라지고 사랑방에 마실 온 분위기를 자아낸 그녀의 굵은 손마디가 일복이 따라다닌다는 걸 단박에 알 수가 있었다.
벽을 등지고 누워있는 환갑을 문턱에 둔 할머니, 아픔보다 삶의 그늘이 더 어둡게 짓누르고 있어서 바람 빠진 풍선보다 더 쪼글쪼글하다.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당신의 아픈 몸보다 부모를 잃은 손녀딸을 위해 생계를 꾸려야 하는 처지에 아픔보다 더 아픈 무거운 한숨이 새 나온다. 할머니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삶의 무게가 작은 키를 더 움츠러들게 한다.
‘알몸으로 태어나서 옷 한 벌은 건졌다’는 대중가요 가사도 있지 않는가. 병은 삶의 긴 터널 속에 잠시 불이 커진 외진 길을 걸어가는 짧은 순간인 거다. 병의 늪 속에 허우적대다 보면 더 깊이 빠지게 마련이다. 생각은 음습해지고 몸은 모래구덩이에 빠진 것처럼 자꾸만 미끄러져 헤치고 나올 수 없는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나도 비록 가벼운 질환으로 입원을 했지만 겨울날 황야의 굶주린 늑대처럼 독을 품고 고통을 잊으려 무진 애를 쓰다가 결국엔 무통주사와 진통제에 매달리며 삶을 애걸하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숨고르기조차 힘겨울 땐 볕들지 않는 지하에 홀로 쪼그리고 있는 것처럼 두려움에 떨며 눈물을 찍어내기도 했다. 걸어 다니기보다 침상에 혼자 일어나 앉을 수 있는 힘만 있어도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않고 빈 마음으로 살아갈 것만 같았던 며칠 전 생각에 쓴웃음이 지어진다. 병들면 부와 명예가 무슨 필요가 있단 말인가. 하지만 병들지 않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저 병드는 것마저도 자연이려니 생각한다.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다.
병원건물 그림자가 길게 내려앉고 수은등이 켜지면 병실마다 밤을 준비한다. 그리고 잘 마련된 밤은 손님처럼 정중하게 찾아와 소곤소곤 속삭이며 방안의 사람들 신음소리에 길들여진다.
창밖에 허물 벗는 꽃잎이 서럽게 느껴지지도 않을 만큼 시간이 흘렀다. 매운바람이 나뭇가지를 훑고 지나가면서 봄을 남겨놓고 가듯이 허리가 끊어지는 아픔은 고목의 그루터기가 아니라 삶의 또 다른 길을 열어 놓고 떠났다. 그렇게 42병동의 일주일은 지나갔다. 저마다의 소망과 희망을 안고 이제와는 사뭇 다른 어둠이 익어간다.
철새처럼 잠시 둥지를 튼, 간이역 같은 곳. 중년여인도 할머니도 모두 또 다른 세상과 깊은 서로의 마음까지 챙겨 퇴원보따리 속에 꾸려 넣었다.
삶의 냄새를 되 짚어보는 뭉클한 일주일간의 봄나들이의 하늘빛은 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