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택 시 그리고 수필

가끔은 바람처럼 달려보고 싶다

임현택 (아리수) 2014. 9. 17. 10:17

 

가끔은 바람처럼 달려보고 싶다. / 임현택

 

  태풍이라더니 먹장구름이 뒤덮였다.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변덕스런 날씨에 자동차까지 고장이 났으니 낭패였다. 분기별로 하는 모임, 외각 모임장소에 참석하려 집을 나섰다. 후덥지근한 날씨로 불쾌지수는 점점 오르고 있었지만 기다리던 모임인지라 가슴은 설레임으로 쿵쿵 널뛰기를 한다.

  골목을 빠져 나오자 잔뜩 머리에 이고 있던 먹구름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 갈 길 바쁜 발걸음을 재촉한다. 버스승강장은 보이지 않는데 장대 같은 빗줄기는 우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운동화속을 파고들어 이내 신발속이 질척거리며 무거워진다. 그래도 못처럼 비오는 날 외각으로 달리는 시내버스 탈 생각에 짜증보단 낭만을 생각하며 빗속을 뛰었다. 단발머리 찰랑거리던 여학생시절 통학버스를 타려고 달리던 때처럼.

  대로로 진입하는 순간 물세례를 받았다. 움푹 파인 도로에 고여 있던 물을 지나가는 행인은 물론 나에게 흠뻑 뒤집어씌우곤 모른 척 자동차는 멀어진다.

청바지야 그렇다지만 하늘빛 파란 블라우스의 얼룩을 보고 있자니 아무렇지 않게 봄 햇살 같은 얼굴을 보였지만 속내는 동짓달 얼음 같은 찬 칼바람이 분다. 또다시 물세례 받을까 승강장까지 가는 내내 어디로 튈지 모를 빗물에 신경 끝은 좌불안석이다.

  거센 비바람을 몰고 온 태풍은 우산살을 휘잡아 밀치고, 난 빼앗기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며 겨우 승강장에 도착했다. 요즘 시내버스 승강장 풍경은 예전과 사뭇 달랐다. 사방 개발지역이다보니 이름 모를 생소한 노선이 거미줄처럼 그려져 있고 버스정차 정보가 한쪽모퉁이 컴퓨터에서 알려주고 있었다. 노선표를 한참을 들여다봐도 도통 알 수가 없어 끙끙거리고 있는데 한 정거장을 더 가 버스를 타야 목적지에 간단다. 이 폭우에 더 걸어가야 할 생각에 처음 설레임은 사라지고 괜스레 짜증스런 분노가 일렁인다. 드문드문 오가는 버스 기다림에 속이 탄다. 약속시간이 늦어질까 부아가 치밀어 오르고 고장 난 자동차가 귀하기보단 애물단지처럼 원망스럽다.

  폭우가 지나가고 잠시 개인하늘 한참 늦게 소담스럽게 잘 가꾸어진 약속장소에 겨우, 겨우 도착했다. 이미 빈 그릇이 눈에 띄는 것이 꽤나 늦게 도착한 모양이다.

고풍스런 실내 풍경, 친구들과 만남의 반가움보다 양말을 벗어들고 앉으려니 왠지 모를 한 숨 반, 서러움 반이 밀려오는 이유는 뭘까?

만남의 장은 화창한 봄날 같은 대화가 무르익어가지만 내 속내는 물이 튄 옷 때문에 온통 신경 끝이 날카롭게 흑, 백을 넘나든다.

  이튼 날, 얼룩진 블라우스를 세탁을 했다. 움푹 파인 곳에 아마 아스팔트 아스콘이 녹아 있었나보다. 빗물과 함께 튀여서 세탁을 해도 영 시원치가 않다. 전문 세탁을 해도 별 소용이 없어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결국 옷을 입지 못하게 돼 버려야만 했다.

운전을 할 때는 몰랐다. 지나는 행인들에게 물이 튀는지를 주방엔 식탁이 있고, 거실에 소파가 있듯 틀에 박힌 고정관념으로 앞만 보고 달리면 그만이라 생각했다.

일상에서 누리던 편안함이 주는 행복을 덤으로 얻은 보너스 같은 것으로 여겼고, 어느 순간에 감각도 없이 당연하게 운전만 하면 그만이다는 생각뿐이었다.

  ‘빨리빨리 문화’가 깊숙이 자리 잡은 우린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때문에 인터넷강대국, 우리나라 학생 디지털 독해력 한국 1위란 엄청난 명예도 있다. 반면 빨리빨리 때문에 우리나라는 과속, 음주, 교통사고 사망자 1위라는 불명예를 달고 산다. 나부터 이기적인 운전습관, 선진국 대열에 있음에도 생활습관이 되버린 ‘빨리빨리’를 ‘느릿느릿’의 기다림의 미학으로 바꾸면 어떨까.

  아끼던 블라우스를 버려야 했지만 사람의 향기, 마음을 적셔낼 수 있는 향기를 얻었던 그날 오랜 된 물건엔 추억 그리고 과거가 담겨져 있는 것처럼 포근했다.

유난히 흐릿한 저녁, 음악을 켜고 감미로운 커피 향을 음미하며 그날의 회상에 잠겨본다. 커피 향을 닮은 그리운 그 사람들 바람결에 진하게 피어오르는 그리움을 달래며 은은한 커피 향처럼 가슴깊이 스며들어 오래도록 머무는 날이다.

  가끔은 바람처럼 달려보고 싶다. 반은 그리움이요 반은 외로움이 찻잔에 녹아내린 날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