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만든 여행지에서

아름다운 그곳 -- 공주 공산성 [公州公山城]

임현택 (아리수) 2014. 8. 17. 17:03




공주 공산성 [公州公山城]

충청남도 공주시 산성동에 있는 백제시대의 산성.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였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었는데,

1993년에 동문터에는 영동루 서문터에는 금서루를 복원하였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공주 쌍수정 사적비(公州 雙樹亭 史蹟碑)

이 비는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1624년)을 피하여 이곳 공산성에 머물렀던 일을 새긴 것으로

1708년(숙종 34년)에 세운 것이다.


비문의 내용에는 이괄의 반란과 인조가 난을 피하게 된 사실을 쓰고 공산성에 머물렀던

 6일간의 일도 기록되어 있다. 비문은 인조 때 영의정을 지낸 신흠이 지은 것이며,

글씨는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이 쓴 것이다


공산성내 서쪽의 해발 85m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 종래 쌍수정 광장으로 불려 왔던

추정 왕궁 터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의하면 임류각(臨流閣)은 궁의 동쪽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산성 쌍수정 [公山城 雙樹亭]

쌍수정은 1624년 이괄(李适)이 난을 일으켜 인조가 남쪽으로 내려와 공산성에서 피난하고 있을 때 두 나무에 기대어 멀리

북쪽 궁궐을 바라보았는데,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에 두 그루의 나무에 금대와 통정대부의 작호를 내린 것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자이다.


공산성 진남루 [公山城 鎭南樓]- 공산성의 남문

성문의 문루(門樓)는 고주를 세우거나 기둥을 높게 하여 2층으로 만드는 것이 보통이지만,

진남루는 성문 출입구 왼쪽의 성벽을 높게 한 다음 그 위에 누각을 올려 2층 문루와 같은 효과를

얻고 있다.


 공산성의 성벽은 이렇게 아름답습니다.





* 영동루 *

공산성의 4개 성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으로 이미 무너져 없어진 것을

1980년에 발굴 조사하여 건물의 밑부분 구조를 확인하였다.

문터 옆 양쪽에서 원래의 문을 지탱하는 돌이 그대로 발견되었다.

공산지의 2층 3칸의 건물이라는 기록을 근거로 동문의 누각을 복원하였다.



공산성은 성 둘레 전체가 여러 종류의 깃발이 꽂혀 있습니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깃발,

그런데 그 깃발의 색상의 따라 그 의미가 다르다 합니다.



* 임류각 *

임류각은 백제 동성왕 왕궁의 동쪽에 건축한 건물로소 신하들의 연회장소로

사용하였다. 2층 건물로 화려한 건축으로 제법 큰 규모로서 새로 복원한 것이다.



성곽을 따라 거닐다 보면 이렇게 비단결 금강이 감싸 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1500년전 고대왕국 대백제의 찬란했던

향취가 다가옴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영은사 *

임진왜란때 승병의 합숙소로 사용되었으며 광해군 8년에 승장을 두어 전국의 사찰을 관리하도록

하였다고 전합니다.

사찰 앞에는 금강이 유유히 흐르고 또한 연지가 있는데 지금은 무너져 통제를 하고 있답니다.





 연지와 금강 사이에 있는 만하루 정자





공산성 [公山城]

성은 백제 문주왕 원년(475)에 한산성(漢山城)에서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가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에 걸쳐 64년 간 도읍지였던 공주를 수호하기 위해 축조한 것이다. 강 건너 북쪽에서 보기에 마치 ‘公’자의 형상을 닮았다 하여 공산성이라 이름 붙여진 것인데, 당연히 공주(公州)의 명칭 유래와도 직접 관련되므로 공주시를 대표할 만한 역사 유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