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현택 (아리수) 2014. 5. 6. 14:00

그림자놀이 -- 임현택

 

나무처럼 아이들은 빨리 자란다. 새싹이 여름이면 녹음을 입고 가을엔 낙엽으로 갈아입는다. 그리고 겨울이면 나이테 하나를 더 두른 나무도 아이들처럼 자란다.

벚꽃이 떨어진 잔가지마다 푸른 옷을 입은 오월이면 괜스레 마음이 분주하다.

‘이모’를 ‘니모’라 부르던 조카가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어린이날이 무엇이지도 모르고 유치원에서 선물을 받아오면 무조건 좋아하던 아이가 조금은 알았다는 듯 자기들을 위해 달라고 생떼를 쓴다. 이젠 치킨이나 파자로는 도무지 해결 할 수가 없어 간단한 간식을 준비해 조카들과 생태공원으로 소풍을 갔다.

 

공원도 시대에 발맞추다보니 바닥이나 놀이기구 주위는 물론 산책로도 흙을 보기가 참으로 힘들다. 폐타이어 보도블록이 흙을 꼭꼭 숨겨 흙이라곤 화단이 전부였다.

공원에서 조차 흙을 밟을 기회가 점점 좁혀져 늘 아쉬웠는데 비록 인공적으로 만들어 놓은 모래밭이지만 모래놀이 하는 아이들무리가 있었다. 자갈과 모래가 있는 공간 아이들이 오밀조밀 하늘로 앙증스런 엉덩이를 들고 모래 놀이 빠졌다. 아이들 무리 중 모래그림을 흉내 내는 아이가 있었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꼬물꼬물 거리는 앙증맞은 손놀림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은 손놀림을 따라 하느라 모두가 열중이다.

 

어렸을 적, 모래에 탑도 쌓고 그림을 그리면서 놀았던 기억이 누구나 한번 쯤 있을 거다. 최근 들어 모래에 그림을 그려서 생명을 불어 넣는 '샌드 애니메이션'이 많은 조명을 받고 있다. 유리판위에 모래를 뿌려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유리 상자 속에 조명을 달고 모래 캔버스를 만들어 그 위에서 드로잉을 한다. 당연 어린이날 공연이나 방송에서도 모래그림자 놀이가 한참인기다. 마술 같은 현란한 손놀림 모두가 무아지경에 빠져 점점 모래그림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세월의 두터워지면 높아가는 것은 나이숫자와 허리사이즈 그리고 추억이란다.

빛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추억은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시골 태생인 나, 초등학교 3학년 때 쯤에야 전기가 가설되었다. 요즘 영화, 드라마 속에서 보는 호롱불, 촛불이 존재했다. 석유를 아끼기 위해 어둑어둑한 초저녁엔 아예 켜 놓질 않고 밤이 내려야만 겨우 하나정도만 켜놓고 지냈던 것 같다.

그땐 형제들이 많았지만 방은 하나, 모두가 옹기종기 모여 생활을 했다. 희미한 불빛 뒤로 길게 드러누운 그림자는 또 하나의 놀이었다. 손가락을 접었다, 폈다 해 토끼, 쥐, 강아지 등 동물을 만들어 싸움도 하고 그림자밟기 내기도 하면서 지냈다. 상상력, 창의력 그리고 형제애도 키웠다. 지금 아이들은 그림자놀이를 모르는 아이들이 태반일 것이다. 동화책속 혹은 공연장에서 볼 수 있을 법하니 말이다.

 

가까이에 있는 조카들조차도 그림자 놀이하는 손 모양을 어설프게 따라하니 말이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밤도 대낮처럼 헌 하게 되자 자연스레 그림자도 사라지면서 그림자놀이도 전기 불 아래 흔적도 없이 기억 속에서만 자리 잡고 있었다. 급격하게 발전하는 세월 앞에 놀이문화 변천사도 덩달아 바쁘게 달음 쳤다.

 

어릴 적 흔하게 하던 놀이가 이젠 민속촌이나 체험 학습으로 습득하고 있는 실정이다. 내 아이들을 키울 땐 아이와 나 모두가 서튼 몸짓으로 여유가 없었다. 그 아이들이 결혼문턱에 이르자 조카들의 눈빛과 행동만 봐도 무엇을 원하고 말하려는지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래서 아이들이 점점 예뻐지면 나이를 먹는다고 했나보다.

동해 해돋이가 가슴을 설레게 한다면 서해 해넘이는 마음을 평온하게 해 주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