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전초(車前草)와 비둘기
차전초(車前草)와 비둘기 / 임현택
시민들의 쉼터인 공원이 도심중앙에 있다. 대부분 노인들이나 유모차에 아기를 태우고 산책 나온 젊은 아낙들이었는데 요즘은 전과 다른 풍경에 씁쓸함이 다가온다. 공원엔 한참 일에 정열을 쏟아야 할 불혹 안팎의 가장들, 건설경기가 좋지 않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일용자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여지저기 무리지어 있다. 느슨하게 매여진 작업화 끈은 무거운 삶을 끌고 다니는 것 같아 애처롭다. 이미 인력시장엘 다녀왔는지 허름한 배낭과 낡은 작업화를 공원의자 위에 아무렇게나 벗어 놓고 술자리가 벌어진 것이다.
경기가 좋지 않아 불황이란 사정으로 가슴 아픈 탄식을 술잔에 붇는다. 힘없는 가장들의 가혹한 현실 앞에 연거푸 털어 넣은 술, 마시다만 몇 방울의 술을 잡초 무성한 화단위에 깊은 한숨과 함께 야속한 듯 툭툭 떨어낸다.
도심에 내리쬐는 열기가 다시 뿜어 올려 져 걷기조차 버거울 정도다. 실낱같은 끈을 부여잡고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더위에 매달려 있는 이파리들. 상가 앞 인도 블록 사이를 비집고 질경이(車前草)들이 돋아나 있다. 한낮에도 오색불빛이 춤을 추고, 냉방으로 굳게 닫힌 상가 안은 대낮보다 더 환한 불빛을 쏟아내는 도심 한복판. 밀고 밀치는 교차로 모퉁이 한복집 앞 가로수둘레와 처마 밑에 돋아나 있는 질경이들 자연적 순수함에 정감이 간다.
햇빛을 향해 여린 순을 뻗고 부채처럼 펼친 질경이, 잡풀들이지만 그늘을 비집고 햇빛을 쫓아간다. 분명 말 못하는 식물도 살아야 한다는 이유가 있다. 그렇게 탄식하고 있는 동안 세상은 냉정하기에 멈추어 있는 자를 추월하는 법, 당연 소득 격차는 벌어져 점점 더 힘들어 지는 게 당연하다. 경기침체로 실업자들은 딱히 갈 곳이 없으니 자연스레 공원으로 모여 세상을 비관하며 술잔을 기울이는 것이 아니겠는가.
저들의 슬픔은 아랑곳없이 한가롭게 먹이를 쪼는 공원 양비둘기들이 아픈 그림자위에 한갓지게 노닐고 있다. 인간에게 길들여져 독립심을 잃어버린 양비둘기, 편한 은신처가 주어지고 주는 먹이를 받아먹다 보니 비만해져 새의 본능마저 잊은 것은 아닌지. 사람들을 졸졸 따라 다니며 혹 과자 부스러기라도 떨어트릴까 종종종 따라 다니는 것이 오히려 발길에 채일 까봐서 사람들이 피해가려 한다.
자연생태의 먹이사슬 속에서 살아남으려면 천적과 끝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산비둘기와 양비둘기의 상반된 모습은, 극과 극을 살아가는 실업자들과 부유층의 빈부 차와 흡사하다.
일 할 곳이 없어 공원에 모여 있지만 이면에는 고학력자의 자존심 때문인지, 아님 양비둘기처럼 실업이 몸에 배인 게 아닐 런지. 일자리를 구하려고 달음 쳤던 초심은 사라지고 실업 생활에 점점 무뎌져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만 같다.
우리들도 양비둘기가 아닌 산비둘기처럼 척박한 자갈밭에 잡초가 살아가는 방식처럼 본능을 잃지 않고 나약함을 버려야 하지 않겠나. 땅 넓은 줄 모르고 하늘 높은 줄만 알고 치솟는 유가폭등은 마음마저 가난하게 만들었다. 궁핍한 현실을 외면하려 하늘도 올려다보지도 못하는 가장들, 무언의 고통이 가슴속을 파고든다. 아리다.
영혼을 맑게 한다는 잡초 질경이, 가뭄과 삼복 뙤약볕에도 그 질긴 생명력은 강하다. 원줄기도 없으면서 땅바닥에 아니 세상가장 낮은 자리에서 숟가락처럼 퍼진 잎을 가졌다. 돌 틈, 길섶에서 쓸모없어 보이지만 짓밟히고 때론 짓 뜯겨도 주저앉지 않는 차전초(車前草)는 우리 삶의 교훈이 될 성싶다.
공원 의자위에 본능을 잃은 나약한 비둘기와 실업자들의 그림이 겹친다. 말복을 밀고 들어온 발끈한 해도 빌딩숲에서 쉬어간다. 어스름이 내리는 시간 마음속의 한 단어 희망을 되새기며 깨금발 들어 파란하늘을 본다.